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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3편 [김형식 2014/03/31]

관리자 0 824 2017.01.27 15:35
시편 133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곧 영생이다.“
 
기름은 하나님이 복을 주어 세우심을 뜻합니다. 얼마나 많이 부어 주셨는지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다. 고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요한1서 2:27] 헐몬산은 레바논과 시리아 국경에 있는 샤르키산맥의 최남단에 있답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높이가 2,814m라고 합니다. 이산에 이슬이 내림으로 갈릴리 바다와 요단강으로 흐르게 됩니다. 온 유대땅을 적시는 생명수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 고합니다. 시온산은 주께서 서신 곳 곧 내 몸입니다.[고린도전서 3:16] 3절에 하나님의 축복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는 곳에 기름부음이 있고, 영생이 있답니다.
 
연합이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와 연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예수와 연합함을 뜻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몸의 각지체입니다.[골로새서 1:18] 그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입니다.[요한복음 15:5]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각 지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각 지체와 연합하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고린도전서 6:15] 연합하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연합하지 않은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유대민족의 전통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돌보았습니다. 동생의 아들을 내 아들처럼 돌보았습니다. 동생을 대신해서 동생의 아들을 돌보는 것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도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본체이고 우리는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14장 14~16절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간단하게 3절로 요약이 되어 있지만, 이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아들었을 것입니다. 다급해서 318명으로 엘람, 고임, 시날, 엘라살 네 왕의 군사들과 밤을 새워 싸웠습니다. 동생의 아들, 곧 내 아들, 롯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술적으로는 자기 조카 하나를 살리기 위해 4나라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를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쟁은 끔찍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축복 하셨죠.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벌하지 않고 축복을 하신 이유는 동생의 아들을 내 아들로 생각하는 마음, 형제가 하나인 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고, 재물을 되찾아 주셨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보내서, 18절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줍니다. 우리가 마시는 떡과 잔이 누구입니까? 그러면 떡과 잔을 주는 멜기세덱은 누구에 대한 예표입니까?[히브리서 6:20]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다는 의미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으로부터 떡과 잔을 받았지만, 우리가 받은 떡과 잔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예수의 몸과 피입니다.[고린도전서 11:23] 시편 133편 3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랍니다.
 
형제연합은 유대민족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아들(엘, 오난, 셀라) 중에 맏아들 엘이 다말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이 죽었죠. 형이 죽으니 동생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건 따라 하시면 안 됩니다. 형수와 시동생이 결혼을 해도 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 중에는 진리를 감추어 두기 위해서 쓰인 구절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을 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사람이 썼다면 19금이든지 판매금지가 되었을 겁니다. 중세기 500년간 캐톨릭에서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둘째 오난에게는 형과 연합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하나님이 오난을 죽게 합니다. 연합을 하면 영생을 하게하고, 연합을 하지 않으면 죽게 합니다. 그러자 이 사실을 모르는 유다는 겁이 났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죽고 이제 셋째 셀라도 형수와 결혼을 하면 죽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막내는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이로 인해 유다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동생이 형을 대신하게 하지 않은 대가입니다. 그 부끄러움은 며느리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부도덕한 유다와 다말을 벌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낳은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의 족보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레스 가문에 태어납니다. 이것도 따라하시면 안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사이에는 지켜야 할선이 있습니다. 유다를 벌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괜찮다는 뜻이 아니고,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유다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답니다. 막내가 죽을까봐 염려해서, 아들을 살리려다 생긴 일입니다. 유다의 마음이 아들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폈습니다. [사무엘하 9:7]“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어라” 합니다. 왕의 밥상에 함께 앉게 합니다. 친구의 아들을 내 아들로 여기는 연합입니다. 내 것과 친구의 것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 연합입니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뮬러(George Mueller, 1805-1898)는 평생 5만번 이상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답니다. 거의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신 거죠. 왜죠? 남의 아들을 내 아들로 여기는 조지의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연합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형제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9]“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혼자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간에 서로 교제를 할 때 성령하나님이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전도서 4:12]“한 사람이면 패하지만,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죽음과 바꾸는 힘든 삶이었습니다. 순교자가 늘어날수록 고아와 과부가 많아 졌습니다. 남은 성도들이 고아와 과부들을 한 가족으로써 돌보아야 했지요. 성도들은 연합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합니다. 순교자가 늘어날수록 고아와 과부가 점점 많아지고, 이 들을 돌보는 일에 히브리인과 헬라인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집사를 세워서 구제하고, 공궤하는 일을 맡깁니다. 7집사를 세웠습니다. 7집사에게 구제와 공궤의 일을 맡겼습니다.
 
이들에게 형제연합이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공동체가 강한 힘을 주었습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다.”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께 붙어있습니다. 예수로부터 힘을 받고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를 떠난 영은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마르듯이 바깥어둠에 버려집니다. 한 나무에 여러 가지가 붙어있습니다. 함께 붙어있는 모든 형제자매는 한 몸 한지체입니다. 한 지체 안에 더 잘나고 못나고 가없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가 암이듯이 지체 중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가 공동체의 적입니다. 자신은 가려지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공동체의 삶을 살았습니다. 네 어머니, 내 어머니가 아닌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친모, 계모, 생모, 유모, 고모, 이모, 숙모와 외숙모까지 모두 어머니였습니다. 네 아들 내 아들이 아닌 우리아들로 키웠습니다. 이런 Familyship이 있었기에 소아시아에서 우랄알타이를 넘어 한반도로 이주를 하면서도 만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수많은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아 세계10위의 경제국가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브레들린들에게 어느 교파보다도 앞선 분별력을 주심으로 빌리그레함은 “모든 크리스천은 Brethren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호칭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자매 또한 육신을 입고 있어서 자매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한 형제, 한 지체입니다. 우리가 형제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들이 말하는 육신적인 관계로서의 부형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형제입니다. 영적인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형제라 불리는 것에 가장 큰 자부심과 자랑이 있습니다. 모임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습관대로, 또 나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이 사용하는 갖가지 감투를 붙여서 불러 주려고 하지만, 나는 “형제“ 그 이상의 호칭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을 하고, 형제자매와 연합을 함으로 보다 나은 분별을 얻고,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영생에 이르게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합니다.[히브리서 2:11] 모임 안에 새로 들어온 형제와 자매들을 한 지체로 여기고 서로 돕고, 보살펴서 사랑으로 양육해야 할 이유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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