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차갑술
오늘 주의 날, 성도님들을 만나서 좋습니다. 본문 말씀은 아가서 2장 10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이 아가서를 읽는다고 합니다. 아가서는 우리와 주님의 사랑의 관계가 묘사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한다고 나오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사랑하고 계신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는데 이처럼이 얼마 만큼인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고 있는지 또 그만큼 드리고 있는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괴롭지만 주님께서는 참으시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2천 년 전에 주님께는 덧없는 기쁨이고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6장을 보면서 가장 감동으로 다가온 장면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의 일어난 사건이 그 내용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있었는데 블레셋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겨지는 장면이 5장이고 그 언약궤가 블레셋에 들어간 그 곳에 하나님의 재앙이 나타나 블레셋 사람들이 병으로 죽고 종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법궤로 우리에게 재앙이 임했나 생각하면서 돌려보냅니다. 어미 소에게 멍에를 메게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지게 합니다. 새끼 송아지는 어미 소와 헤어지는 것을 알고 슬프게 부릅니다. 어미 소가 슬프게 울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있어야 할 장소인 이스라엘 벳세멧으로 갔는데 수레는 나무 장작이 되게 하고, 소는 번제로 드려지는 장면을 봅니다. 자신이 끌고 간 수레로 인해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로 인해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나아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게 그 당시 소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을까하며 십자가의 모형을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입니다.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을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데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누가복음 22:42)” 하셨던 주님께서 굳게 마음의 결심을 하고 나아가신 것입니다. 금년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금년 주제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을 결심하고 성경 탐독을 결심하고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올 해 절반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송구하는 마음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모임적으로 봤을 때는 침례를 한 번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에 확실히 결심하고 묵묵히 그 길을 갔을 때 우리는 그 분을 따른다고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가고 있는가? 이와 같은 연약을 가지고 있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사실을 마음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 분께서 우리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게으름, 다시 일어나 그 분 앞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 환경, 여건을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내 심령이 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깨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고 땀이 핏방울같이 떨어지는 것이 나오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책망하시고 모든 것을 담대히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모든 상황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갈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가는 요나에게 풍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뱃사람이 와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내 심령이 잠자는 상태가 있지 않은가를 봅니다. 우리 가정을 위해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일깨우고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야가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세벨과 싸움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세벨에게 피하여 죽음을 면하는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바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850명과 싸워서도 이겼던 엘리야가 초라하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시 새롭게 일꾼으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지금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를 불러 일으키시고 우리 삶 속에 부르시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 함께 가자”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아가서 1장 5절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볼품없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어여쁘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며 구원하여 주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보면 주님과의 교제하는 장소와 시간이 약 8~9번 정도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남의 장소 3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만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지 보기를 바랍니다. 1장 3~4절입니다. 그의 방에서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방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소인 침궁입니다. 침궁이 어떤지 아십니까? 그 분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소에서는 꾸미는 것을 다 벗어던지고 나아가는 곳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리와 같은 가슴을 두드리며 통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침궁입니다. 예배를 하러 나오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가식도 의식도 외식도 다 던져버리고 하나님 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 참된 교제의 장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면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이 나옵니다. 인격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아담이 자신의 몸을 가렸을 때 멀어졌습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회개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도말하셨다는 그 사실만으로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아가서 1장 12절을 보면 오늘도 상에 둘러 앉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만찬을 하는 장소인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 모임 안에서 질서가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점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임에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세는 제사장으로 누구나 똑같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형제들이 거의 다 참여하는 것을 보고 감사기도 또한 2~3분 정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풍성한 예배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을 보면서 할 수 있으면 많은 모임들을 방문하고 배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배는 글자 그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넋두리를 널어놓는 시간이 아니라 감사하고 찬양이나 기도를 하는 것은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으면 합니다. 요즘은 집사 형제들이 광고를 하고 있는데, 들을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예비 된 마음으로 광고가 드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에게 임무가 주어지고, 모임 전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때때로 뒤에 나가서 성도들이 얼마나 왔는지, 자세를 보고는 합니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나가시는 분도 있고 서성이시는 분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그 자리도 정돈해서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왕이신 그 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면 합니다.
모든 만물이 가장 번성하는 6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만물이 생동하고 약동하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이 계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면 얼어붙은 모든 것들은 다 옛말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아직도 성도 간에 얼어붙은 부분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녹아지고 인격 대 인격으로서 아름다운 사귐이 있고 개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한 심령으로 교제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철도 아닌 이제 여름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 심령이 성숙하는 계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가자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 노량진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새로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러하였지만 신약시대에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받음(에베소서 1장 13절)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주관하고 내가 그 분의 주관 하에 들어가서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님께 내 모든 것이 붙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다시 나가지는 않지만, 내 안에 붙은 불이 잦아드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성도들을 대할 때에도 이와 같은 것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