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25
부흥된 교회의 자질
추상현.
울산중부교회의 성도들을 대신해서 문안드립니다. “너희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어느 교회일까요? 교회로서의 모델을 제시한 사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 있는데요. 다른 서신서에서도 그 교회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들었던 분들을 돌아보고자 2차 여행을 출발할 즈음에 바나바의 원하는 바인 마가와 다시 동행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 그리고 외조모 루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믿음을 받은 디모데와 동행하였습니다.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 계속 막으시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환상 속에서 마게도니아 사람들이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복음을 전했는데, 자주 장사 루디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진지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의 도를 도우면서 그 자매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가 구원을 받고 시작된 것이 빌립보 교회입니다. 생명의 복음이 증거 되고 구원의 역사가 전해질 때,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북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3주간 머물면서 성경을 강론하였습니다(행 17:2). 헬라인들의 반응은 경건한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쫓았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면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어 베뢰아로 이동하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집중적으로 그 말씀을 사모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덴(아테네)에 머물면서 수개월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중에 사도 바울은 3주 정도밖에 머물러 있지 못했던 데살로니가를 생각하면서 디모데를 보내면서 격려와 가르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살전 3:1).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면서 전도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행 18:5). 그 중에 들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보낸 편지가 바로 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부흥 된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1:1~10)에는 부흥이 된 신앙의 기초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반석이 매우 견고하였습니다. 5절에서 보면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전해야 하는 것이고 전하는 것을 듣는 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0:14).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었던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불과 3주 동안 전했던 복음과 진리의 가르침이 견고한 기초가 된 것입니다.
요 14장에 보면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할 것이고 곧 오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들여다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하지만 그걸 돕는 역할로 성령님이 계십니다. 계시라고 표현되는 이것은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격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 중에서 가장 먼저 하시는 것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실토하고 회개하며 자복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삶의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실이 없는가? 여기에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서두르거나 성급하게 주님보다 앞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삶에 변화를 주시려 하실 때도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하는 것입니다. 한 성도가 구원을 받고 주일, 수요일, 금요일 모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성도의 수가 동일하지 않고 갈수록 적어진다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불참하게 됩니다. 누구 때문일까요? 앞선 형제, 자매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지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신령한 것들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옛 것이 버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을 보면 에스겔 앞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나왔다고 하지만, 속에는 다른 마음을 품은 걸 볼 수 있습니다. 경청이라는 것은 원어로 ‘쉐마’라고 하는데 명령을 받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자세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이 기수에게서 무슨 명령이 떨어질지 즉시 달려 나가기를 위해 귀를 세우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자세로 경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그렇지만, 나는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인가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을 경외하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이런 일이 모두 성령님의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 가운데 기초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생의 사역(요 3:6~7)은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으로 말씀으로 죄 사함을 해주십니다. 영생을 얻고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확신 평안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성령님께서는 세례의 사역, 기름 부음의 사역, 간구의 사역(롬 8:26,27), 증거의 사역(롬 8:15, 16), 인침의 사역(고후 1:22, 엡 1:13, 4:30), 거하심의 사역(요 14:16,17, 고전 6:19), 충만케 하심의 사역(엡 5:17,18)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충만함 안에서 아낌없이 헌신하며 우리의 생애를 불사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케 하시는 사역(요 16:11, 히 2:14)으로 현재 고난이 가혹해도 승리의 기쁨을 필연적으로 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은 떠나는 것이 실상의 유익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살전 1:9를 보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옛 것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기쁨으로 환란을 극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살전 1:6).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갈고 스데반을 밀치고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보좌에 주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였는데 ‘그가 자니라’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와 일꾼들의 신앙을 본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겸손하고, 본받고 싶은 신앙의 모델이 분명히 서 있습니다. 내가 본받고자 하는 모델이 모임 안에 있습니까? 본받을 대상이나 성도가 없는 그 교회는 불행한 것입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셨던 임종원 형제님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지식을 갖춘 가르침은 없었지만, 성도를 섬기는 그 모습에서 많은 배움을 받았습니다. 맥카피 형제님 등 말씀을 전하는 메시지를 접하면서 풍부한 은혜롭고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 부녀들 가운데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되어야 할 분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그 믿음의 형제님, 자매님처럼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사도 바울의 모습이 그들에게 본이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본받고 싶은 장로형제님, 모친님들이 있습니다, 일꾼을 항한 기도와 격려를 많이 받았는데 이것은 상당히 귀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가족과 이웃을 위해 진다는 것이 정말 복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직장에서, 사회에서 주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에 대한 핍박이 있었고, 로마 시대에는 로마 황제로부터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힘들어지고 가난해지고 박해가 있을수록 나그네 인생임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8:1~2), 세상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사모하였습니다(살전 1:10). 화려하고 입만 번지르르하던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교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담은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는 환경과 무관합니다. 모두 다 핑계입니다. 단지 우리가 주님과 거리가 멀어진 것뿐입니다. 또한 년 수와도 무관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원받아도 깨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 앞에 더 다가가는 것입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누가복음 13:30)” 대상이 유대인, 교회라고 볼 수도 있지만 노량진 성도님들께서 이 말씀을 붙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부흥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 구원의 강대상이 높고 예배당도 얼마나 컸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량진모임하면 지방에서는 교회의 모델을 삼고 싶은 교회였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이 되셔서 전국의 모범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잘 나타내는 모임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딤후 2:15를 보면 큰 집에 다양한 그릇이 있는데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 있습니다. 다만 주님 곁에 있다면 모양새가 이상해도 언제라도 주님께서 들어서 쓰시고 싶을 때 쓰시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