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3.
예수님을 만남
최병배
우리는 누구를 믿기 참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를 믿는 다는 것은 잘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요즈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성범죄의 대부분은 우리 주변에 지금 까지 잘 알고 지내오던 이웃인걸 보면 “이웃사촌”이라는 우리의 정겨운 단어가 이제는 경계와 의심의 대명사로 누구도 믿지 못하고, 믿지 말아야 하는 오늘날의 안타까운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이라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을 소개하면서 이 분을 믿으시라고 말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잘 아는 것일 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기는 알되 진정한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깊이 내제된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소개한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깊이 사귈 때 상대방의 인격에 신뢰가 쌓이는 것처럼 그 분의 마음을 알고 신뢰하여 의심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인격적인 소통과 감화가 있는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과 마음을 나누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영접”은 진정 나의 마음속에 상대방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며 영접한 대상으로 하여 나 안에서의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는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로 쓰여졌지만 결코 사람의 뜻과 사상을 반영하는 철학책이 아닙니다. “성령”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통해 서 쓰여진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책입니다.
요한복음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에서 더욱 이 성경이 하나님 자신임을 증거 하면서 성경이 오직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 이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몸을 입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 우리 인간의 태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그 모양을 직접 만드시고 생명을 불어 넣어 마치 우리의 자녀가 부모인 우리의 모습을 닮듯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에 있어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중대한 잘 못이 있듯 이 일 역시 그러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라고 합니다. 이 죄는 이 태초의 두 사람에게 머문 것이 아니라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죄의 결과인 사망은 우리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이후의 끔찍한 현실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 말씀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바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옥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던 지옥 가는 것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인간의 탄생과 종말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일까요? 정말 사람을 지옥에 넣으려고 만드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죽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3: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이렇게 시작하는 성경의 이야기는 솔로몬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하루 밤 사이에 죽은 한 아기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의 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살아있는 다른 아기를 자신의 아기라 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왕을 찾은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입니다. 이 난제를 앞에 두고 왕은 칼을 가져오라하여 산아기를 반으로 나눌 것을 명령합니다. 참 기가 막힌 판결입니다. 산 아기마저 죽이라는 명령이지요. 이 명령이 떨어지자 한 여인이 자지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죽이지 말 것을 호소합니다. 이는 자신의 친권을 포기하겠다는 어머니의 절규였습니다. 판결의 종말을 어떠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모정이 진실을 드러냈습니다.
요한복음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로라는 자가 죽었습니다.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그의 여동생중 마르다 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한 말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얘기해줍니다. 요한복음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ale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또 한명의 여동생인 마리아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마리아 역시 그 언니 되는 마르다와 같은 말을 합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너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요한복음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예수님이 바라는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이 말이 아니었겠습니까? 이제 곧 끔찍하게 죽을 아기를 바라보게 될 엄마의 처절한 마음의 고통과 사랑하는 인간들이 지옥 불 가운데 고통 받는 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다를까요? 엄마가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살리려는 아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제가 다니는 회사의 한 아이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아이로 병원에서 치료중인 아이였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몸마저 성하지 못한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말에 무조건 예라고 만하면 되.”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이러하실 것입니다. “너희들은 예만 하면 되.” “내가 다 갚았어.”
이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영접하십시오.
고린도후서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에베소서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