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8.24
예배(요한복음 4장 20~26절)
송찬호
백발청년 송찬호입니다. 제가 청년이라고 하는 이유는 청년에게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일 때에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는 1940년생입니다. 그리고 1967년 2월에 서울에 와서 노량진 모임에 참석하다가 5월 7일에 주님을 영접하고, 50년 가까운 시간을 주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보다 행복한 분은 없을 것 입니다. 주께 갈 시간이 얼마 안 남다 보니까 더욱 성도님들이 보고 싶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서대문 모임 성도들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인 중에 죄악 되고 죄악 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사마리아를 통해 지나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사마리아는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돌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지나가고자 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에서 꼭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67년부터 예배를 드려 왔는데, 새삼스럽게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니까 난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뭐든지 익숙해지다 보면 습관적으로 합니다. 특별한 손님이 오면 특별이 대하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에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지만, 습관을 좇아 기도드리고 전도하는 것도 좋지만,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우리와 같이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각 사용하는 뜻이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지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쓰레기 취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마리아를 일부러 찾아가셨고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12시 정오에 물을 기르러 나온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워서 밖에 없을 때에 나온다는 것 입니다. 3장에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없다고 말씀 하고 있고, 4장에서는 이 물을 마시면 생명이 샘솟으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믿어야지라고 하지만 누구나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의 믿으려는 의지도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봅니다. 학생들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한 학생이 발언권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곤 선생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뇌를 만져본 적이 있습니까? 선생님의 뇌를 다른 사람이 본적 있습니까? 선생님의 뇌를 직접 본적은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은 뇌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예절은 상대방에게 절을 하는 문화입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엎드려 절하는 것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공경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어떻습니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배를 오전예배라 하면서 성가대가 찬송하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많은 성도들은 만찬예배라 해서 만찬이 끝나면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나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서 말하는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특권은 예배, 교육, 전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을 영접하자마자 사마리아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의 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영은 형식을 떠나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처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눈치와 순서에 맞춰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청경하고 분별하고 순종하는 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변화무쌍합니다. 모임의 예배 수준은 모임의 영적 수준이라고 말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면 하나님께 공경하고 경외하며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본다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크게 다릅니다. 본다는 것은 장을 본다, 며느리 본다, 등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 본다는 의미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각 단어들은 여러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성도들이 이러한 단어 때문에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마음 속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순종으로 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늙은 종이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예배 시간에 회계의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분들을 이해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도도 기다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회계의 기도를 드리고 나면 다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 입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들은 돌출을 많이 봅니다. 끝까지 부르기 힘든 찬송을 선택 할 때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도 배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못 박아 있는 신앙 자세도 잘 못 된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이러한 찬송과 이러한 감사만 드려야 된다는 것도, 마음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면 억지로 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는 소용 없습니다.
말라기 1장 6절과 8절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침례 상담을 마치고 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이 자매는 침례 상담을 패스했으나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예배를 드리다가 이 말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이 자매는 이 말씀을 보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예배시간에도 구원을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
12장에서 보면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옥합이 이 시대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평생에 한번 한명에게 드릴 정도로 귀합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향기가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에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서대문 모임의 한 성도는 주님을 믿고 나서 가족들에게 전도를 하지만 가족들은 이 성도에게 미쳤다고 얘기를 합니다.
저는 믿기 전에 그리스도인을 보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좋은 일요일에 죽치고 앉아 있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죄 사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구도자인 경우에는 모임에 올 때 가장 힘든 건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구도자들이 예배 시간을 힘들어 하는 것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구도자들도 예배에 집중하다보면 달라질 것입니다.
전도와 헌금을 잘 하는 사람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의 세칙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분명한 목소리로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