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20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한 업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겠다며 극히 작은 것에도 철저했던 그들이 정작 십일조에 담겨진 영적 의미나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책망 받으며 화가 미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의 뜻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건과 거룩에 철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로귀환 이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결과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며 준행하는 움직임이 제사장보다는 일반유대인들에게서 이뤄졌으며 이를 계승한 것이 바리새인들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인간이 가진 성향중 하나를 꼽는다면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치우친다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어 다른 쪽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균형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영향의 불균형, 신체의 불균형, 생각의 불균형 등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선함으로 시작되었던 바리새인들의 행함은 한쪽으로 치우침으로 결국 예수님께 ‘화있을진저’라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흥'이란 말 뜻 가운데는 회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의 부흥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우리의 신앙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침으로 인해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성들을 계시하시는데 이를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시90:2)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욥 5:9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창17:1)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시편 139:3)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렘 23:24)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말 3: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16,요 16:27,엡 2:4)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딛 2:11,롬 5:15)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시 103:8)
분명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또한 이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창 18:25,시편 9:8,렘 11:20) ‘공의’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이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수 24:19,신 5:9)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십니다.(신 9:19,겔 20:33)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이런 속성도 갖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 입장에서 좋은 것, 유리한 것 즉 사랑, 은혜, 긍휼, 자비 등을 강조한 나머지 눅15장에 나타난 아버지, 집 나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였지만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버선발로 뛰어나가 얼싸안으며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고 감싸주시는 아버지로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등한히 하며 방종의 삶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죽기까지 내어주신 뜨거운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또한 우리를 향해 차가운 사랑의 회초리를 드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가치관을 회복하여 균형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고 기록된 것처럼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이 구원을 성경에서는 3가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칭의’에 해당하는 신분적 구원입니다. 이것은 한번 얻게 되면 잃거나 변치않는 영원한 것입니다.(요 1:12-13, 롬 3:23-24, 엡 1:7)
둘째 ‘성화’에 해당하는 현재의 구원, 삶의 구원입니다.
빌 2:12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힘과 노력과 의지로 이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통치와 다스림에 순종하고 따를 때 가능합니다.
셋째 ‘영화’에 해당하는 영화구원으로 이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칭의 구원이 이뤄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화와는 상관없이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롬 8:18-30)
우리의 이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출발, 시작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가운데 예수그리스의 십자가는 절대적입니다. 결코 이 십자가의 사랑과 사역을 잊거나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하고 명심할 것은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 현재 살아 역사하시며 활동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죄에 대한 죽음이라면 부활은 의에 대한 삶입니다.
십자가가 죄의 옷을 벗는 것이라면 부활은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신분구원의 기초라면 부활은 성화의 기초입니다.
십자가가 옛사람의 죽음이라면 부활은 새사람의 출생입니다.
십자가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라면 부활은 이루어가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결코 어느 한쪽으로 지우치거나 기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감사하다하여 그곳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성장하며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침례식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 하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예식을 지키고 행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만찬예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눅 22:14-20/고전 11:24-25)
둘째로 침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침례가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은 롬 6:1-14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침례는 물속에 들어가는 의식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첫째로 침례는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입니다.
둘째로 침례는 물속에 잠김으로 옛사람인 나도 죽어 장사되어짐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물 밖으로 나옴으로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침례를 통하여 믿는 자가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살아갈 것을 약속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침례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여 죽었으며 다시 살아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린 구원받은 자로서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살아갈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앞에 고백했으며 또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이 보는 가운데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침례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부활신앙의 참의미를 되새겨봄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삶 가운데 균형 있게 살아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