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말씀교제

불러낸 무리 모임-팀 스태포드(성도교제) [2012/07/05 ]

관리자 0 1,258 2017.01.28 05:39
2012.7.1
 
 
불러낸 무리 모임
팀 스태포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교회는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면 보이는 건물과 같은 외관상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 건물 안에 있는 주님 피로 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모이는 공간에 너무 많은 신경을 씁니다. 여기 모여 있는 성도들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교회는 생물입니다! 주님의 몸 또한 시체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몸이고 목숨이 있는 몸입니다. 건물은 생명이 없습니다. 벽돌, 나무, 시멘트, 콘크리트뿐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지만, 건물은 가지 못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예쁘게 지어도 건물은 인간이 세우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을 보겠습니다. 가인은 채소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드렸습니다. 양과 같은 동물은 배설물도 나오고, 식물이 사람들의 눈에 더 예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돌이 아니면 빈 깡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임 안에 성도가 없으면 빈 깡통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인도 내가 드리는 제물이 훨씬 더 예쁘다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가인과 같지 않은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교회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교회의 뜻을 해설하겠습니다. 제가 쓰는 한글은 서투른 표현이라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단어가 합쳐진 건데 에크(Ek, 외부에 있는 것) + 클레시아(klessia,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모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건물이나 세상에서부터 나오는 것은 무리뿐이 안 됩니다. 우리는 명령과 초대, 부르심을 받아서 모임이 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번역한 것은 잘 안되었어요. church라는 말은 옛 헬라어인데 ‘크로리오스’(주의 것)입니다. 여기서의 주는 주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할 때 모임이 아닌 교회가 사용되어서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32를 보시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아데미와 쓰스 우상을 만들던 사람이 바울을 따라가자 시위를 벌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모인 무리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모임이 아닙니다. 단지 바울을 향해 달려들던 현재 시위는 그 전보다 점잖아졌는데, 한국에서는 시위를 벌일 때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시위를 할 당시 무리를 짓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임이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나오라!”라는 말입니다. 신약 뿐 아니라 구역에서도 모임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1, 23을 보시면 아담에게 잠을 재우고 아담의 뼈를 바깥으로 뽑아서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남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벌써 나오면 시기상조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흙으로 만들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기를 우리의 몸 밖에서 안으로 넣어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0절을 보시면 그의 아내에게 이름을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여자를 통해서 메시야들이 온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창세기 12장 1절을 보시면,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람(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면서 시키시는 대로 복종을 하고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모임에 대해 작은 그림자부터 점점 크게 보여주고, 어떻게 보여주는지 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멋진 모임을 소망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3절을 보시면 ‘여러 족속’ 가운데 ‘모임’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가는 장면을 보시면서 창세기 12장 2, 3절을 보시면 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출애굽 하는 장면에서 나오라고 했을 때 바로 왕은 어떤 태도였습니까? 쉽게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습니다. 이 세상도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이 세상도 신은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는 사람들이 눈을 못 보게 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나 광야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나오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느냐면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물도 마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데리고 나와서 주리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나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불러 낸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애굽의 왕 바로가 높은 위치였지만, 애굽 위에는 천국이 있고 그 천국 위에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서 보내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부려먹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쉬게 해주신다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만족 못하는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친구가 있습니다. 겉모습으로 봐서 무서운 사람입니다. 미국의 전화회사에서 전선작업을 통해 일하는데 도와달라고 한 사람이 왔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왔습니다. “지옥같이 덥습니다. 지옥은 이것보다 훨씬 더 덥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제 친구는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거라는 말을 듣고 그 뒤로 복음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지옥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가나안 땅이 무엇인가요? 그 땅에 들어갔을 때는 편히 쉬지 않고 매일매일 전쟁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3, 15절을 읽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꿀과 우유가 나오는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없으면 즐길 수도 없는 땅입니다. 15절에 보시면 같이 가지 않으면 우리도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광야에서의 삶입니다. 살기 싫은 곳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 방향으로 빛을 비추시고 소금 버리는 것이 주님의 모임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보다 더 큰 주님의 빛을 비추시는 것(마 5:13)입니다. 달빛을 보시면 반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면 세상과 부딪치게 됩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인데도 그렇습니다. 세상 방향으로 빛을 비추고 소금으로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우리 모임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비출 때는 어두움이 도망갑니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는 한국보다 바퀴벌레가 더 많이 있습니다. 캄보디아에도 바퀴벌레가 있습니다. 그런 바퀴벌레가 싫어하는 것이 빛입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찬양을 드림으로 굳게 서는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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