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말씀교제

2012/02/26 고린도후서 6:14~17-송찬호(성도교제)

관리자 0 760 2017.01.23 09:39

2012.2.5

고린도후서 6:14~17
송찬호
자녀나 손 자녀, 또한 청년 남녀를 위하여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 연소한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설계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특별히 노량진에 부름을 받은 데에는 주례를 한 몇몇 가정이 있는데 A/S를 하라고 부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의 가정은 연락이 없지만 연락해오는 가정을 보면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어서 뜨끔한데 좋은 소식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례번호 16번 김윤희 형제님 부부를 시작으로 박래혁 형제님 부부, 노세종 형제님 부부, 차영수 형제님 부부, 조현호 형제님 부부, 박세훈 형제님 부부 등의 주례를 하였는데 서대문 딸들을 데려오신 분들은 후회가 없으실 것입니다. 천성이 주님 안에서 착하기 때문에 시집가서도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결혼 문제를 언제부터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은 그 부모님이 결혼할 때부터 두 사람의 결혼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성교제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교제가 시작되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딸의 이성교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아들의 이성교제의 성향이 결정됩니다. 저는 이성교제라는 말을 쓰게 될 때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노량진모임에 1967년에 처음 참석하였는데 어떤 형제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교제’하시겠습니까? 하는데 남자끼리 무슨 교제인가 생각해보고 성경을 읽어보았는데 교제라는 말이 꽤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서너 살부터 저는 옆집에 사는 친구와 소꿉놀이로 이성교제를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상경한 뒤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제가 학교에 입학한 뒤로 큰 아이들은 남자끼리, 여자끼리 앉히는데 저와 같이 아담한 친구들은 맨 앞자리에 같이 앉히는데 그 때는 참 주눅이 들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방학 때 고향을 찾아가는데 저 아래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올라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짝이었습니다. 차 한 대가 지나갈만한 좁은 신작로에서 서로가 못 본 척을 하고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뒤를 돌아보니 그 친구 또한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와도 연락이 끊겨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여자들이 모이는 장소, 남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나뉘어 있고 강단에 서는 강사만 양쪽을 볼 수 있고 나가는 문 또한 형제와 자매가 서로 달랐지만 예배당이 연애 당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교제 가운데서 남자친구와 여자 친구 가운데 풍성히 많은 것을 배우며 이해하고 대화하며 성장해가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당부하시는 것은 믿는 자와 멍에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가 좋아지는데 그건 사단이 준 것인가요?’, ‘믿지 않는 자와 미팅은 어떤가요?’, ‘위 성경 말씀(고후 6:14~17)을 결혼에 적용할 때 그 기준이 어떠한지요?’, ‘불신자와 교제하는 성도에게 뭐라고 충고해야 할까요?’, ‘때로는 결혼한 후에 그 한쪽이 구원받은 것으로 거짓증거를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결혼은 어떻게 되나요?’, ‘믿지 않는 자를 모임으로 데려와 구원을 받게 하는 건성도 수가 늘어나는 등 유익이 되지 않을까요?’ 등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많은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한 가지 말씀해주시는 부분이 바로 처음에 읽었던 고린도후서 6:14~17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뜻은 말씀 그대로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번역된 부분들을 찾아보면 충성스럽지 못한 자, 신실하지 못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유의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간절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믿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전이 일치하고, 장래에 대한 생각이 일치하고, 중요한 가르침에 있어서 일치하고, 정말 문제없이 평생을 함께 갈 만한 사람이어야 믿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 신실한 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믿는다고 해서 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경우에는 괜찮겠지 생각하고 결혼 후 신혼여행부터 각자의 모임으로 나가자고 줄넘기를 하게 되는데 갈등이 심화될 때는 둘 다 모임을 나가지 못하고 타협점을 차츰차츰 찾아가는 걸 봤습니다.
성경에서 이 구절과 비슷한 다른 구절이 레위기 19장 19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하나님께서 불신 결혼을 보게 될 때 어느 정도로 보시느냐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는 것처럼 보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녀가 결혼하는 이 일은 말과 나귀가 교미를 해서 생산을 다시 할 수 없는 노새를 낳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람을 따르자니 신앙이 울고, 신앙을 따르자니 사람이 우는 것이 아니라 좋아 보이거나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불행한 출발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는데 창세기 24장 3~4절을 보게 되면 ‘가나안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 그 지역에서 끼리끼리 모였다고 한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성도들 간에는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같은 목표와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며 같은 하나님을 부르고 같은 믿음, 같은 소망,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출 10:34, 신 7장을 통해 며느리와 사위에 대한 부분, 왕상 11장에서는 솔로몬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후에 어두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람과 토끼는 귀를 잡는 것입니다. 귀를 잡게 되면 끌려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서로가 동화되고 오래 살아간 부부는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식, 언행, 습관, 생활 및 사고방식이 전체적으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워해서도 사랑해서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순탄하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스 9장, 느 10장, 13장에서도 혼인의 문제를 지적해줍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40년 동안 모임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성도들의 경험 가운데서 불신교제와 결혼이 얼마나 해로운가? 그들의 결혼이 행복해도 그 동기에 대해 본인이 주님께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의 배우자가 믿고 믿지 않던 배우자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도 물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성도의 마음 가운데에는 내 동기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혼 문제만큼 고민스러운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청년의 때에 짝을 만나지 못하면 얼마나 외로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만나게 되면 행복이 쏟아지는 것 같지만 사실 또 괴로운 것입니다. 시일이 흐르면서 사랑이 성사하면 좋지만 결혼한 부부는 싸우면서도 헤어질 줄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삐끗하면 헤어지기 쉬운 불안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헤어지고 나서는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괴로움과 그리움이 번복이 되는 시기입니다. 희망에서 보면 청년 시절은 좋아 보이고, 건강과 장래가 있는 시기이지만 제가 겪었던 사춘기, 청소년 시절은 시고 떨떠름한 시기였습니다. 만약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결혼이 이종 교배처럼 하나님께서 불순하게 보신다면, 그리고 고후 6장 말씀으로 돌아가서 14절에 보면 1) 의와 불법은 공존할 수 없으며, 2)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기 마련이고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을 수 없는데, 마찬가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15절에는 3) 그리스도와 사단(벨리알, 히브리어에서 유래, 불량배 등)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관인데 동합을 해서 분깃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의 분깃을 받을 수 없습니다. 16절은 5)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상 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노량진에 어려서부터 자라던 성도가 서대문에 계시는데 그 경우에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불신결혼으로 모임에 참석이 힘들었고 시어머님께서 절에 다니시고 불경을 베끼시는 분이고 그 아들은 어머니 생전에는 어머니를 따르겠다는 분입니다. 그런 분 가운데 어떻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두 자녀를 출산한 가운데 힘겨운 모임 생활과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하는 걸 보면서 결혼의 성패를 판가름합니다. 여자가 유대인이면 유대인 쪽으로 분류합니다. 남자가 가장으로 버티면 될 것 같지만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목이다. 라는 말처럼 머리의 움직임을 목이 조종하는 것처럼 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 내 지위와 역할이 좀 더 강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등학생 간의 교제도 교제이지만, 결혼을 전제로 한 장래를 위한 교제는 교제를 하기 시작할 때 큰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교제를 계속하겠다고 생각이 들면 교제하는 것이 좋고 피차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전제는 ‘믿음’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전제는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한다는 것은 인격상의 일치가 불가능하고, 신앙생활의 분명히 고통이 따르게 되고 생활이나 삶에 있어서 강조점이 다르고 가정에서 작은 천국을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고 자녀를 양육하는데 혼선이 빚을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서로 전혀 다르며 신뢰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처럼 한 이불 덮고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고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서로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분별합니다. 중매를 하는 분도 꼼꼼히 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충청도 사람이고 자매는 서울 사람인데 처음 부딪친 부분이 고추장찌개와 된장찌개였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동화되는 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장래에 대해 생각이 비슷하면 좋습니다. 선교에 대한 비전이 맞지 않아 이혼 후 선교는커녕 생활비와 위자료를 매달 지급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또한 성격은 대조적일 수록 좋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성적표부터 온순, 침착 하며 로 시작합니다. 노량진에서 주일학교를 같이 섬기면서 자매의 활발한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결혼 하고나서 보니 닮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서로를 닮을 것을 강요하다 몇 년 뒤에 크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사랑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데 그게 천생연분인 것입니다. 서로 보완이 되어 완성이 되지 둘 다 인색한 사람이면 그 집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고 둘 다 헙헙한 사람이면 기둥뿌리가 남아나지 못합니다. 서로를 위해 토다는 집이 좋은 집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합니다. 여당과 야당, 정당 간의 싸움은 정치를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테러의 위협도 없이 참 좋은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인데,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들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는 믿는 자와 함께 하는 귀한 간증들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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