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말씀교제

2012/02/26 기도와 응답-송기섭(성도교제)

관리자 0 712 2017.01.23 09:43
2012.2.25
 
 
기도와 응답

송기섭
 
제 기억 상으로는 선교지 가기 전 8년 전에 노량진에 와서 뵙고 교제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셔서 좋은 교제를 나눌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가 되고 성도님께 감사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빌립보서 3장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원래 제 고향은 경기도 안성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근처 고삼저수지라고 크게 있는데 학교 바로 옆에 있어서 여름철이 되면 비가 많이 오게 되면 가두었다가 물을 빼게 되면 물고기나 우렁이를 잡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물을 가두었던 것과 뺀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간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머물러 있고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낙심시키거나 근심시키는 일이 수도 없이 늘어나게 되고 최근에는 보성에서 일어난 일로 좌절하게 되고 황당하게 되며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기독교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괴롭고 낙심케 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재하고 있고 사도 바울의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를 소망한다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말씀을 보면 계속 머물러 있기를 소망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주님이 나의 삶 속에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날씨가 추운 겨울에 산천초목이 죽은 것처럼 말라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달 정도가 지나면 남풍이 불면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햇볕이 내리쬐고 그 곳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조용한 가운데 죽은 것처럼 보이던 그 곳에서 생명력이 약동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나타나는데 요란함이 없습니다. 단지 생명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조용하지만 풀이 나고 줄기가 나고 잎이 나면 생명력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죽으심 뿐 만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하는 그 능력이 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7절 말씀에 따르면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교회에 대한 터를 닦으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많은 서신서를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계시들을 부여받으면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 가운데 계시를 받았고 선택받고 부름 받은 주의 종이지만 괴롭게 하는 육체에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떤 측면에서 위로가 되고 격려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만하지 않게 육체에 가시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눈병이 아니겠는가? 라는 추측을 하는데 만약 눈병이라고 한다면 다른 질병이나 어려움을 받는 사람들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잠깐 생각을 해보십시오. 훌륭한사도 바울이 육체에 가시가 있는 이유는 하늘의 속한 계시가 너무나 중하고 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를 생각해 보면 하늘에 속한 계시를 직접 받았다면 믿음으로 화합하고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약속을 붙들고 있다는 측면에서 동일성과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았던 육체에 가시가 성도들에게 있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행복합니다!” 라고 전도할 때 쓰는데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그러한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어려움, 생각해보지 못한 고난 등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사람이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육체에 가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성도는 지속적으로 질병과 고통으로 낙심하게 되는 걸 볼 수 있고, 어떤 성도는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성도에게도 뇌성마비 자녀가 있어서 늘 고통과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을 보았습니다. 환경 가운데 쉽게 해방되지 않는 가운데 주님께 죄를 짓지 않지만 고통당하고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며 눈물로 한숨짓는 걸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하늘에 속한 구원과 소망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으로 인하여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8절을 보시면 자기의 고통, 질병, 어려움 등을 주님께 간구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기도와 간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이하에 보면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마치 호흡하는 것처럼 아뢰며 나아가는 것이라 한다면 간구는 우리말로 ‘부르짖는다’라고 표현이 가능한데 시편에서 이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벽을 보며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간구했던 것처럼 소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가 있지만 간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회복을 구할 때 내가 주님 앞에 큰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답답함을 느끼고 변화를 느끼지만 영적인 소생이 안 되어 영적으로 심령의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기도를 넘어서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골방으로 들어가서 간절하게 소망을 아뢰는 경우가 우리의 삶 속에 종종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하고 부르짖는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번 간구하였는데요. 짧게 읍조리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거나 일주일동안 기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씀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기도에는 1) 곧바로 응답하는 것, 2) 기다리게 하는 것, 3)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의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님께서 응답하시면 많은 격려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많은 낙심이 되고 고통이 됩니다. 제가 안식년에 성남수정교회를 바라보면서 예배당을 위해 기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07년부터 구체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형제님들이 기도와 회의를 하면서 전원예배당보다는 도시 중앙에 있고 이왕이면 전철이 있는 곳에 위치하여 양육하자는 협의를 하였는데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몇 년 간에 장소 간에 문제가 있는 것을 듣게 되었고 예배당을 위해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부분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바도 없고 선교지에서 들었을 때 성도님들을 감동시켜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많이 낙심되어 있었고 지도력에 어려움을 보면서 젊은 사람을 보내고 제가 성남에 머무르기로 하였습니다. 이 실망된 마음을 보면서 주님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드렸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땅을 사서 건물을 짓는 것은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고 11층 건물 가운데 8층이 있었는데 일반 교회에서 쓰던 곳이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은 여리고성 전법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수요 집회 갈 때마다 1층에 있는 가요주점의 불빛이 참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블레셋을 치는 과정 중에서 “올라가라. 네게 블레셋을 붙이겠다.” 라고 말씀하신 역대상 말씀을 받고 함께 했던 그 말씀을 보는데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마음의 감동과 격려로 경매하기 5일 전 기도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형제와 장로들이 모여 모의 경매를 해보았습니다. 최고와 최저의 금액을 제외하고 써보자! 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모친님들이 기도해주시는데 이사야 57장 13절을 읽어 보세요 라는 모친님의 기도와 말씀이 있었습니다. 경매장에서 저희 성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목하자 성도들이 서로 쳐다보았는데 판사가 자료를 뒤지더니 정정으로 성남수정교회가 지목되어 많은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았습니다. 하나 재밌는 것은 이사야 말씀에 나오는 ‘거룩한 산’과 교회가 위치한 빌딩 이름이 성산빌딩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라”는 말씀을 통해 격려 받았습니다. 9층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같은 층 내에는 종교시설이 겹칠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 틀대로 하면 예배당 홀이 좁아지고 틀대로 하지 않으면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연제교회를 설계했던 형제님이 직장 문제로 올라와서 예배당을 설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설계사로서의 삶을 걸고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담당 구청 직원이 3일 동안에 출근을 안 하더니 3일 후에 승인을 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간섭하심으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장로교 노회 사무실이 있는데 이곳과 이단시비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 노회에 속한 총무를 통해 형제교회의 장점과 특징을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갈등이나 어려움을 피할 뿐 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 변호할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통해 주님의 응답이 들렸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사도 바울이 원하는 대로의 응답은 아니었습니다. 그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깨우쳐 보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이 나의 삶에서 주인이 되시고 역사하시는 가운데 있어서 통치하시고 인도하심에 따라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사도 바울처럼 크게 기뻐함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그의 삶의 능력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반하게 된다면 영적인 능력이 상실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나의 삶가운데 주님의 역사하시는 손길 가운데 주님께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일반적으로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불평하게 되며 원망하게 됩니다. 종종 모기를 생각합니다.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은 평균 온도가 30도인데요. 대한민국은 여름에만 모기를 물리지만, 동남아시아는 1년 내내 모기와 싸우는데 환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어두울 때 나타납니다. 저녁, 밤이 되면 모기가 달려듭니다. 우리가 빛에 속하지 않고 어둠에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사단의 공격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소망하기보다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 때 사단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주는 것을 봅니다. 모임에 가지 않게 되고 2~3주가 지나 전화 올 것 같으면 한 번 나왔다가 다시 장기간 모임에 오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영적으로 좌절하고 실망하며 처절하게 공격을 당한 상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구원 받은 지 5년, 10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주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때 우리 영적 삶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럴 때 주님을 더 신뢰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갖게 하는 그것이 질그릇 속에 보배되신 주님을 의뢰하고 신뢰하게 되면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머무는 것을 소망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낙담하고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뒤로 물러나며 침륜에 빠지는데 그럴 때 주님께서 나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지만 구원의 능력과 간증의 능력이 삶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성도가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지 못하는 게 사단의 전략인데요.
그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라고 말하면서 간증은 아름답지만 옛날 것을 추억하면서 그 때만을 소망하고 지금, 앞으로 역사하실 주님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왕년으로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모두 동일하신 분이지만, 역사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추구하지 않는다면 세상 속에 자기의 관심을 두고 간증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거하실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능력을 알고 성장해야 하는 것이지 그저 늙어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과실을 맺는 그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부활의 능력의 소망을 늘 주시기를 원하는데 작은 것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머무는 것을 보지 않을 때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주님 나는 안 됩니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나를 소생시키는 분입니다. 라고 간증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나 모임적으로 능욕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회복시켜주시고 정결케 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쓸려내려 가지 아니하고 내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장막처럼 머물러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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