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실

한국 모임이 걸어온길 5

바위섬 0 1,051 2017.02.09 22:03
“…군전도활동은 김종만 형제님이 불광동 교회에서 사역하실 때, 여러 부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부분으로 춘천지역에서의 활동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전파의 좋은 기회였습니다.
77년 당시 남춘천역 근처에 위치한 부대에는 군인교회가 있었지만, 군목이 없어 다시 강태문 병장(현재 전부남부 모임 사역)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중 근처 부대에 근무하던 추복현 형제님이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전도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목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복음 증거에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부대를 통해서 구원받은 형제들이 한국 교회의 여러 곳에서 사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강태문(전주남부교회 사역), 김형국(대전내동교회), 오규철(화정교회), 정달진(서서울교회), 서생석 형제님 외에 여러 형제님들이 그때 구원받은 열매들입니다.”
 
부산 복음선교

부산은 한국의 제 2도시로서 6·25 사변 이후에는 한때 임시 정부가 있었던 대도시입니다. 제임스 선교사는 부산을 마음에 두고 1969년에 한번 다녀갔으며
1970년도에는 부산 남성초등학교(사립)영어 담당교사로 발령을 받고 부산에 내려가 우선 호텔에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3일 안으로 개인집에서 영어를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숙박과 식사를 제공할 집을 물색 하던 중에 학교자모회장으로부터 평소에 잘 아는 국제부인회 임원인 김원길씨(현구덕모임 김태헌 장로 부인)에게 부탁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영어가 잘 통해야 하겠기에 다른 집에 소개한 것보다는 자기 집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어 모시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어 부산에 처음으로 모임이 세워지는 광영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형제님이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므로 일본 다까사끼에서 선교사로 수고하는 베이컨 형제님을 강사로 초청하여 부산역 앞 예식장을 빌려서 특별 복음전도 집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 때 동역자로 참가한 모임들은 전국에서 고작 12개 모임의 노량진 박준형, 서창식, 지복흥 형제님과 부평의 강태훈 형제님, 부여의 권오홍 형제님, 사후동의 이춘원, 이수원 형제님, 김제 대촌의 김성복 형제님, 선산의 문덕무 형제님, 부산에 거주하던 이덕만 형제님,
외미의 서명수 형제님, 외에 김태헌 형제님 가족 등 전국에서 일꾼들이 다 모여 협력하여 모두 부산에 내려와 4,5일간 대 집회를 거행하여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주일날에는 임시로 수영 우정보육원에서 만찬예배로 처음 모여, 떡을 떼므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후 이춘원 형제님 가정을 초청하여 부산에 내려와 구덕에서 모이다가 구덕모임 전체가 동래로 이주하여 크게 주님이 역사하였습니다. 김태헌 형제님 가정은 거리가 먼 관계로 본가 2층을 모임장소로 정하고 이름을 구덕예배당이라 하여 형제님 가정을 위시하여 여러 형매님들이 구덕에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 구덕 교회가 되어 지금까지 주님을 잘 섬겨오고 있습니다.
 
서독에서의 구원의 역사 
  
심영숙 자매님(1946년생)은 1969년 노량진에서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은 후 주님을 섬기던 중 서독에서 한국인 간호원과 광부를 초청하는 시대가 도래 하여 해외 진출의 좋은 기회로 삼아 대학 영문과 출신인 심영숙 자매는 간단한 훈련을 받고 보조 간호원 자격으로 독일 베를린에 있는 병원에 1970년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처음사랑이 불타서 동료들을 상대로 처음에는 기숙사방에서 두, 세 사람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구원을 받는 자매들이 일어나 점점 수가 많아져서 Hpenstrass모임 장소를 빌려서 모이던 중 독일인 모임의 형제님들을 초청하여 성경공부와 수양회를 개최하여 복음과 말씀교제를 통해서 양육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독일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독일어는 통하지 않고 영어로 심영숙 자매님이 통역을 하므로 언어의 불편 없이 좋은 사귐을 갖게되어 영적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간호원들은 점점 수가 많아졌으며 서독각처에서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앤더슨 형제님도 가서 돌보고, 독일 형제님들은 Happe형제님, Br. Nagie형제님, 그 외 형제님들과 Johanna자매님, 엘마 자매님 등 여러 분들이 도왔습니다. 예배는 가까운 모임으로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서 베를린 지역에서는 박순덕 자매님(노량진모임), 배나옥 자매님(노량진모임), 조광자 자매님, 조광숙 자매님, 임분희 자매님(영등포모임), 최임자 자매님(안양모임), 임양임 자매님(군산모임), 나종금 자매님(잠실모임), 김훈조 자매님(서구미모임), 임옥수 자매님(은평모임), 강인숙 자매님(부산연제모임), 윤영순(서울 서부모임), 전영숙 자매님(속초모임), 안월순, 왕철수 성도부부(부천모임)등 외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아 독일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귀국하여 현재도 각 지역교회에서 열심히 주님을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노바 지역에서도 여러 가정이 구원을 받아 그 지역모임에 속하면서 지금까지 주님을 신실히 섬기고 있으며 스타인벡 장로 형제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노자매님은 하노바 지역뿐만 아니라 서독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하노바 모임에서 조 형제님 가정, 김운봉 형제님 가정, 그 외 여러 형제자매님들이 주님을 지금도 잘 섬겨오고 있습니다.
 
성훈중학교  
  
1970년 초 성훈 중학교(사립) 교장선생인 최영만 선생님은(당시 50대 후반) 영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으로서 제임스 선교사를 차 안에서 영어로 말을 건네서 알게 되어 노량진 모임을 가끔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의 관심보다는 친절과 사랑으로 영접하시는 선교사들과 노량진 형제들도 알게 되어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정신숙 자매가 성훈 중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를 하게 되어 학생들에게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일이면 학생들을 모임에 데리고 나왔으며 학교에서 복음을 자유로이 전했습니다.

김용호 형제(침례회 목사)도 성훈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1973년 학생들에게 침례상담을 하였으며, 모두 한결 같이 선명하게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침례상담을 통해서 간증을 듣는 우리들은 깊은 감명을 받게 되어 그 십수 명의 학생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최친수 교감선생님은 간증이 시원치 않다 해서 차후로 미루었습니다. 그 다음번에 많은 학생들이 구원을 받아 침례를 주게 되었는데, 그 때 최친수 형제님의 간증도 처음 간증과 같으나 어떤 형제님은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니 침례를 주지 말자고 했으나 본인의 신앙간증에 의하여 주는 것이니, 침례를 주어도 괜찮다고 하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럼 왜 분별이 다른 이유는 어느 형제님은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거듭났으므로 자기 기준을 볼 때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 침례를 주지 않았다면 귀한 형제님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교감선생님이 구원을 받은 관계로 학교는 미션 스쿨이 되었으며 복음을 더욱 자유롭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 형제님들이 방문한 경우 전교생을 모이게 하여 복음을 전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1975년 최친수 형제님은 정신숙 자매님과 결혼을 하고 부부가 캐나다 이민 길에 올라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선교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인 관계로 먼 거리에서 통학한 학생이 많았으며 졸업 후에 모임으로 인도된 학생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성훈학교 출신으로 현재까지 주님을 진실히 섬기는 조철영 형제님(봉천동모임), 권혁주 형제님(봉천동모임), 자매님으로는 신경난(남부 부천모임 성갑철 장노부인), 허은숙(신림동 모임 사역자 전경렬 형제님부인), 신광섭(안양 평촌모임 엄성호 장로부인), 임선예(안산동부 안오희 형제님부인)등 다수가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선교부  
  
1960년 10월 미국 크레어코트 모임과 콜로라도 스프링모임에서 월버 맥카피 내외를 한국에 선교사역을 위해 파송하였습니다. 설립 목적은 한국의 낙후된 농촌 복음화를 위해서 구호 및 보건을 통한 선교를 위해서 1961년 경남 장팔리 모임을 개척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여 복음을 전하시다가 1963년 9월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동천리 사후동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개시하였으며, 농업과 목장을 직접 경영하면서 일꾼들을 채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이웃에 사는 마을 주민들에게 아침마다 젖소의 우유를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특히 결핵환자들을 수용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후동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사후동 모임을 일찍이 시작하였습니다.

1965년에는 엠마오 성경 통신학교 운영권을 맡아 하다가, 1966년 엠마오 성경학교를 위해 서울에 파송된 던함, 롤라, 화이자 선교사들에게 서울 지역을 그들에게 운영을 하도록 해주고, 그외 지역을 담당하다가 나중에는 전체 엠마오 운영권을 서울 엠마오 성경학교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위한 업무를 하였는데 기타 행정업무를 도왔습니다. 한국모임에는 어떤 조직이 없으므로 종교법인이나 정부의 등록된 기관이 없으므로 한국 기독교 선교부는 정부승인을 받은 기관이므로 기독 선교부에서 신원을 인정하면, 예를 들어 예배당 건축허가 내지 등기 및 문화여권발급에 관한 업무를 통하여 사역자들이 외국에 출타할 경우 많은 도움을 입어 순조롭게 문화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될 때까지는 기독교 선교부의 도움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그 동안 사후동을 중심으로 많은 일꾼이 배출되고 보건사업이나 수양회를 통해서 한국 모임을 위해서 맥카피선교사 내외는 물론 염일부 형제님을 비롯하여 많은 봉사자들이 수고를 하였습니다.
 
지방교회  
  
한국에 지방교회가 세워지고 대전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휘하에 장교로 근무하던 중 권익원은 공산군과 격전 중 부상을 당하여 대만으로 이송되어 군병원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지방교회에 소속되어 이름을 왕중생(王重生)이라 개명하여 활동을 하다가 조국인 한국으로 건너와서 대전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지방교회는 본래 중국인 워치만 니(본명은 니토셍)의 3대 제자의 한 사람인 이상수(위트리스 리)는 1930년대부터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될 때까지 워치만 니를 도와준 동역자입니다.
워치만 니는 중국 선교를 위해서 큰 공헌을 남긴 분입니다. 많은 저서도 남기고 공산군에 의하여 점령을 당할 때 피난을 가지 않은 이유는 양떼를 두고 도망갈 수 있느냐 하면서 그대로 남아 큰 핍박과 고난을 당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는 제자인 이상수를 불러 자기 재산인 제약회사 중 3개를 운영했는데 그 중 하나를 정리한 돈을 금으로 바꿔서 한 뭉치는 내주면서 대만에 건너가 선교를 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49년 중국국토가 공산화 할 때 대만으로 건너와서도 자금이 풍족하여 집회소를 구입하여 활발히 선교를 하였다는 것이 대만에서 믿을만한 형제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모임의 형제님들은 피난 살림에서도 매일 저녁 판자촌에서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지방교회는 넉넉한 자금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왕중생 씨는 그런 환경에서 지냈다고 봅니다. 대전에 와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쉬운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하고자 시도했습니다.
1971년 경 대전에는 기독교 신앙월간지 “승리의 생활”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형제들인 우종억 형제님(현 광주침례교회 목사)등이 권오홍 형제님(당시 부여내산 원머루 모임 사역자)을 대전으로 불러들여 흡수유치하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자신은 자칭 사도라 하면서 젊은 일꾼들에게 유혹하여 한 지역을 담당하는 목사 안수를 집행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형제를 찾아 미혹하여 수명의 형제들이 미혹되어 목사안수를 받고 맹종하게 되었으나 얼마 있다가 돌아서므로 모임의 형제들에게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구원을 받았으나 교회진리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일부지역의 형제들은 미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 지역에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행정단위에 한 교회를 주장하면서 서울의 노량진모임은 서울 교회가 아니므로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도 안계시고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1972년경 대구지역에서 많은 형제자매들이 미혹을 당하였으나 몇 명의 형제들도 그와 함께 부산까지 원정을 하여 동래모임을 찾아가 자신들의 주장을 폈지만 당시 이춘원 형제님은 말씀으로 그들의 주장을 물리쳤으며, 형제자매님들이 이춘원 형제님과 함께 함으로 부산에서는 그들이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 한번 대전에서 왕중생씨와 노량진 모임의 박준형 형제님이 그를 거짓 교사라고 경고한 결과, 모임에 손을 대지 못하고, 선교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미혹된 형제자매들이 아는 사람을 끌기 위해서 잘 아는 모임의 형매님들을 미혹하려 하였으나 정체가 거짓 교사로 판명된 이상, 미혹되는 이가 별로 없었으나, 혹 미혹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혹되어 모임을 떠났다가도 돌아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천 도화동모임  
  
1972년 5월 노량진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던 훼리스 선교사와 바 선교사(아일랜드)는 인천을 두고 기도하던 중 교회로 시작하기 전에 결혼 예식장을 빌려 2주간 정도 복음 특별집회를 가졌으며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유광웅 형제님가정과 이주섭 형제님 가정 외 형제자매들이 협력하였으며 노량진은 물론 여러 지역 형매님들이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동역을 하였습니다. 곧 바로 인천(도화동)에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인천에는 무의도 출신들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구로동 모임  
  
부여군 내산면 원머루 모임에서 구원을 받은 김익수 형제님 내외가 1969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신림동 난곡(철거민촌)에 이사 와서 노량진 모임으로 옮겼습니다. 형제님은 1972년 신촌쪽으로 이사하므로 모임을 아현모임으로 옮겼습니다.
형제님 가정은 1973년 8월에 돈암동 언덕에 있는 판자촌에서 가정 집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일어나 다음해인 1974년 정능 입구에 미아교회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구원을 받은 형제는 김주호 형제님(강북모임 장로), 김옥주 자매님(노량진 모임) 그 외 여러 분들이 구원을 받아 모임을 시작하여 많은 영혼들이 날로 더해져갔습니다. 김익수 형제님의 아내인 백순기 자매님은 옷 수선을 하면서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79년 김익수 형제님은 1979년 홍성에 진도 6이란 한국에서 심한편이라 할 수 있는 지진으로 인해 신문에 대문짝만한 피해상황을 보고 홍성으로 내려가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홍성은 고향인 부여와 이웃한 고을인데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내가 안가면 누가 가겠는가 하는 각오로 내렸습니다. 필자는 그의 말을 듣고 가면 고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주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미아 모임을 주님께 맡기고 그 큰 지진으로도 깨닫지 못한 고향의 영혼들을 위해 아이들을 업고 홍성으로 떠나 그곳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면서, 한편 염소를 치면서 자비량전도를 하였습니다.

첫 열매로는 그 당시 대학생인 전영하 형제님(안산동부모임 장로)이었습니다. 또 한 가정은 당시 홍성읍에서 빵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인데, 형제님은 그 집에 가서 무보수로 일하되, 전도는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몇 달 동안 일을 해주었습니다. 빵 가게 주인은 생활간증에 놀라 결국 믿음을 갖게 되어, 그 형제님 가정이 구원을 받았으며, 홍성에서 주님을 잘 섬기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현재까지 잠실모임에서 주님을 신실히 섬기고 있는 그의 이름은 이기성 형제님입니다.
 
성남모임 
  
1974년 6월 노량진 모임에서 제임스 선교사, 한혜동 형제님 가정, 김효수, 이환영, 이상지 형제님 외 20여명이 구로동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구로공단에서 근무하는 형제자매님들이 있었으며, 일찍이 가정집회를 가졌는데 신우열 자매님 가정에서 처음 가졌습니다.
노량진에 나오는 성도들 가운데는 구로동에 사시는 형제자매님들이 많았고 개척이 필요한 것을 아신 제임스 형제님은 본래 대형 천막 전도 집회를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터라, 그곳에서 그동안 수차례 천막집회를 가진바 있습니다. 구로동에서도 천막집회를 했는데, 2주간 특별전도 집회 2주간 마지막 날인 토요일, 전도 집회가 끝난 후에 제임스 형제님을 비롯한 형제자매님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모인 가운데서 그동안 노량진에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섬겨왔는데 내일부터 시작되는 구로동 모임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 표해 달라고 했습니다. 구로동에서 주님을 섬길 것을 확신한 손을 든 형제자매님들이 주일인 다음날 예배에 노량진으로 오지 않고 구로동으로 참석하며 주님을 섬기는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량진 성도들은 평안과 기쁨으로 보내드릴 수 있게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래서 서울은 노량진, 아현, 그리고 구로모임이 개척되므로 세 모임으로 늘어났습니다.
 
신림동모임 (현 봉천동모임)  
  
1975년 신명희 형제님 가정, 최봉출, 정진옥 형제님 가족과 구자숙 자매님 가족과 그 외 형제자매들이 가정집회를 가져왔습니다. 모임이 세워지기 전에 형제자매님들이 주일이면 모두 노량진에서 예배와 교제를 나눠왔습니다. 성남에도 모임이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 이뤄져서 그곳에서도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76년 5월에는 신림동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오랫동안 박준형 형제님 가정에서 가정집회로 모이던 모임이었습니다. 참석자는 신림동 근처에 사시는 형제자매님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시작한 멤버는 윤병헌, 손유호, 임권수, 빌리 스티븐슨, 윤주석, 김용호등 형제자매님들과 아현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던 정홍 형제님 가정도 후에 봉천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이 너무나 쟁쟁하고 스티븐슨 선교사 가정도 함께 동역하게 되므로 큰 힘이 되기도 하여 빠른 성장을 한 반면, 신학문제로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1970년대의 노량진모임은 주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잘 형통하여 주일학교로부터 학생회, 청년들, 성인 형제 자매들을 풍성하게 축복하여 주셔서 넘치므로 여러 곳에 개척하여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침례식은 너무나 자주 하게 되어 성도들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는 믿음의 가정들의 자녀들은 물론 근처는 주택지로 밀집되어 많은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1972년 일곱 살배기 이준동 어린이(1966년생)가 가까운 교회로 나와 주일학교학생이 되어 일곱 살 위인 이현동 중학생인 형을 교회로 나가자고 알려주어 형제가 일찍이 주님을 믿게 되어 주일학교와서 학생회에 성실한 학생으로 잘 자랐으며 나중에 양친 부모님을 전도하여 모임 안에 들어오게 한 경우입니다. 지금은 어엿한 30대 후반의 모임일꾼이 되었으며, 형은 40대 초반의 형제입니다.

1972년 이승희 여중생(현 안성모임 장기석 형제부인)은 동네 골목에서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김영숙 자매님(현 캐나다 뱅쿠버모임 강선호 사역자 부인)을 만나 동네로 이사 온 선생님 댁으로 가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으며, 장로교회에 몸담고 있던 작은 오빠에게 노량진모임을 소개하여 작은 오빠인 이상지 형제님은 1973년 1월에 구원을 받았으며, 이상지 형제님은 형인 이상격 형제님(속초모임 사역자)을 인도하여 노량진모임에서 1974년 구원을 받아 침례를 받았습니다. 형제님은 1982년에 강원도 인제군의 풍전동모임을 개척하여 전심사역을 하기 전까지 노량진에서 신실히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1974년 수요일 집회가 끝난후에 인천 기독병원 부설 간호학과 조교수인 김보경 자매님(뉴저지 모임 사역자 정형모 형제님 부인)이 학생을 인도하여 처음으로 나와 저에게 소개하기를 “형제님! 이 학생은 저보다도 나이는 위입니다”고 하면서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는 1학년 학생치고는 나이가 좀 많아 보였습니다. 학생은 김희주 학생입니다(미국 애틀란타 한인 모임 천응식 형제님 부인). 자매님은 기독교로 위장한 이단종파인 동방교회에 미혹되어 모친인 안경자 자매님(애틀란타 한인모임) 모녀가 이단소굴에 빠져 연대간호학과 1년에 휴학하고 수년간 그곳에 몸담아 있으므로 다시 복학 하려해도 복학이 안 되어 할 수없이 인천 기독병원 부설 간호학과 1년에 입학을 하므로 주님 안의 자매이며 학교 스승인 김보경 자매님을 알게 되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을 받아 변화되므로 담대한 힘을 얻어 부친과 동료인 김성주, 윤순옥 부부와 김리라 자매님 등 동방교회에 속했던 무리들을 노량진으로 인도하여, 모두 구원을 받을 뿐아니라, 가족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김성주, 윤옥순 부부는 여동생 김영주(안양 평촌모임 이성구 장로부인), 남동생 김동주 형제님(이천모임), 부친이신 김명진 형제님(묵동모임 召天), 황연순 자매님(묵동모임)과 그 외 가족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김리라 자매님(서울 북부모임)은 어머님이신 서정자 자매님(서울 북부모임), 그리고 김선운(서울 북부모임), 김선호 형제님(태국 창마이에서 선교사역중)과 그 외 가족들과 여러 분들을 인도한 경우입니다.
1970년대는 기록하고자 한다면 너무나 방대하므로 기록에 들지 않은 사항은 연혁을 통하여 간단한 기록으로 대체하겠습니다.

1972년 송찬호 형제님 가정 아현모임으로 천거
1973년 구학모 형제님 침례
1974년 2월 차갑술 형제님 가정 무의교회로부터 천거
1975년 그리스도 전도대회 데릭빙함(아일랜드 벨파스트 모임 전도자) 초청 노량진, 아현모임 공동주최로 서울운동장 대집회 성황리 개최
1976년 구도자 전도협회 방송전도개시 담당자(박준형 형제님 현 북부모임 사역자)
1977년 김광호, 김남복 형제님 침례
1978년 9월 서독 하노버 모임 초청으로 박준형 형제님 방독, 그후 미국 시카고 방문, 미국에서 전도사역 개시
1979년 노량진 예배당 건축(81년 1월 헌당)
1979년 경북 봉화군 두음리모임 개척


조성국 형제님(경산모임 사역중 召天)은 두메 산골인 이곳에서 놀랍게 역사하여 노량진모임 성도 수차례 방문전도 김영길 형제님(용인모임)과 누이동생 부부(김영숙, 이종해)가 동해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며 김진철 형제님(김경산모임)외에 박영희 박종희 자매님이 구미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모두 그 모임의 열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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