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실

한국 모임이 걸어온 길 9 과거를 분석하라 (권오홍)

바위섬 0 1,242 2017.02.09 22:15
충청지역 모임역사

충청지역 모임 역사를 말할 때, 근래(1990년대 이후 2003년 현재까지)의 사정은, 당사자들이 젊고 또 대부분 각 교회에서 기록된 문서로 남겨두기 때문에 이후에도 필요하면 읽어 볼 수 있을 것이지만, 젊은 성도들이 잘 모르는 부분은 1960년대에서 80년대의 소위 말하는 초창기모임 역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는 분들도 점점 적어져서 더 늦기 전에 기록하여 둘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신데, 저도 공감하여 제가 아는 대로 본대로 적어두려고 합니다. 충청지역 초창기 모임의 역사는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서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역사만 기록하겠습니다.

1. 염티(염치) 모임 시작된 내력

온양에서 39번 도로로 아산만방조제 방향으로 6km 쯤 가면, 도로변에 “아산시 염치읍 염성리”라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있습니다. 이 곳을 1965년 여름 8월경 보리타작할 즈음, 노량진 모임에서 박준형, 이종경, 하진승 등등의 당시 26-27세 되는 청년 형제님들이 복음을 전하실 목적으로, 박기수 형제님 댁을 방문하시는데, 박기수 형제님은 박준형 형제님의 친 형님이십니다. 박준형 형제님이 열심히 전하셨고, 설교가 끝난 후 모두들 개인 교제를 하셨습니다. 그 집회에는 박기수 형제님을 비롯하여 자매님, 그리고 박형제님의 모친과 고향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여 복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신 박준형 형제님이 얼마나 열심히 증거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어머님과 형님 형수님, 그리고 고향사람들인데, ‘이 분들이 이 은혜의 복음과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지옥 불 속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면서 복음 깨닫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셨을 형제님의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아들의 그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들이 전하는 연설(?)을 들으시면서 모친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점도 궁금하려니와, 박기수 형제님도 그 귀한 복음을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셨다고 하십니다. 전도하러 오셨던 형제님들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3일간 집회를 하였지만, 그리고 몇 사람은 복음을 깨달으셨을 것으로 믿고 싶으셨으나, 박기수 형제님의 증언에 의하면 그 때에는 한 사람도 열매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오신 형제님들은, 특히 박준형 형제님은 어찌 그 심령이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겠습니까?

그 다음해 1966년이 되어 박준형 형제님은 다시 제임스 선교사님, 강태훈, 이종경 등 다수의 형제님들을 모시고 또 다시 천막 복음집회를 하셨다고 합니다. 주로 제임스 형제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박준형 형제님이 통역을, 그리고 모든 형제님들이 각개 격파 식으로 개인교제를 하셨는데, 주님께서 비로소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영혼들이 복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니 박기수 형제님은 요3:16, 36절, 요 5:24절 등의 말씀을 설명 듣고 구원을 얻었다고 간증하십니다. 이때 구원받으신 분들이 박기수, 진갑득(박기수 형제님 부인), 양윤순, 박00 자매님(강희억 형제 모친), 김주영 자매님 부부, 박호숙 자매님(이수원 형제 부인) 등인데, 복음을 전하셨던 형제님들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감사하셨겠습니까? 이 복음집회에 동역 하셨던 형제님들의 웃으시는 환한 얼굴들을 그려봅니다. 형제님들은 간증을 듣기도 하시고 옆에서 분별도 하시면서 침례 주는데 공감하시고 마을 앞 하천에서 침례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침례식은 핍박의 신호탄인 듯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여호와증인이다”, “침례교냐?” “여자들이 수건쓰고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단이다”라고 비난하였다고 합니다. 박기수 형제님은 다니시던 성산 감리교회에서 재정까지 맡아보시던 분이셨는데, 복음을 깨닫고는 즉시 그 교회를 안 나가시고, 헛간을 개조하여 집회소로 사용하면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오늘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후 계속 서창식 형제님(고인이 되심), 화이자 선교사님, 컥 선교사님, 지복흥 형제님(현 노량진 교회), 김종만 형제님(현 잠실 교회)들이 방문하셨고 한상일(현 대전 서부교회) 형제님은 얼마간(1970년) 염티 모임에 계셨으며, 저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계속 있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여기 이름을 기록하면 김일순 노 자매님(고인이 되심. 박기수, 박준형 형님의 모친) 강희억 형제, 김종승 자매, 김영자 자매, 김국태 자매, 김연태 자매, 박준규 형제님 등 그 외에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이렇게 해서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성경말씀대로 모이는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1966년 7-8월이니(박기수 형제님의 큰딸이 한 살 때라고 진갑득 자매님이 간증하신다), 오늘날 농촌교회의 공통적 현상인 자녀 교육문제로 도시로 이사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박기수 형제님이 힘드셨으나, 천안에서 정태영 형제님 부부가 염티 모임을 섬기는 일에 동역 하심으로(1997년도부터) 염티 식구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는 15-6명 식구들이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리며 복음의 등불을 밝혀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부여 내산 원머루 모임이 시작된 내력

1964년 11월 29일 권오홍 형제가 노량진모임에서(서울 노량진 삼중의원 2층 시절) 구원의 확신을 갖고 내산 교회로 옵니다. 당시 권오홍 형제는 한국 기독교장로교회 내산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권오홍 형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은 단번의 구속이요 영원한 구속이셨다”라는 말씀의 기초 위에 신앙의 토대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 확신”과 “나는 거듭났다”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義人)”이란 이 사실을 성경 말씀으로 확인 받고 행복하였습니다. 동시에 권오홍은 큰 일 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산 장로교회 교인들은 구속의 진리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모두 지옥 가는데 이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권오홍 형제는 이 진리를 알려 주어야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뜨거워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죄 사함 받는 방법은 용서받기를 기도하는 회개였습니다. 한가지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간절한 회개가 있어야 하며, 또 자기의 죄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죄가 있기 때문에, 그 하나 하나의 죄들을 한 가지 한 가지 모두 기억해서 낱낱이 용서를 구하는 회개가 있어야 죄를 용서받아 구원의 자격을 겨우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얻은 구원의 자격도 또다시 하나의 죄를 범하면, 구원의 자격을 잃고 다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을 다시 얻기 위하여 또 회개해야 하고 또 죄를 범하면 다시 회개가 반복해서 요구되는 줄 알았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은 평안이란 경험할 수 없고, 항상 율법의 높은 수준과 자기 실생활과의 거리감을 메울 수 없어서, ‘나는 항상 죄인입니다' 생각하면서 죄책감(罪責感)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려니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게도 “확실한 구원은 죽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때 교인들의 의식이었으며, 또한 거의 모든 한국교회 신앙 상태였습입니다. 그러한 교인들 앞에서 권오홍은, 죄 용서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증거하며, 십자가 구속의 범위는 “우리의 모든 죄들”이라고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수요일인가, 날자는 기억 할 수 없지만 칠판에 우리들이 느끼는 죄를 설명하면서 “우리들의 죄”라고 했을 때 그 죄는 정확히 말해서 “나의 죄들”이라(영어로 sins, 롬3:25, 4:7, 11:27등)는 설명을 열심히 한 다음, 그 죄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히 속죄하셨다고 히브리서(히9:12, 히9:28, 히10:2, 히10:10)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열심히 설명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복음전한 결과는 놀랍게도, “그러면 죄를 져도 되느냐? 이해 못하겠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의 낱낱의 죄들을 회개하는 회개 행위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믿음을 합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만을 믿는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십자가의 구속은 불완전한 구속이다.” 라는 희한한 주장과 함께 권오홍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1966년 8월 여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뒷산 영천 기도원이라는 곳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내산 장로교회 교인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권오홍도 참석하였는데, 교인 중 몇 몇 사람이 제 설교내용을 목사님에게 이야기 한 것 같았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회개와 구원과의 관계설명 중에서 “낱낱의 죄를 회개치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말씀하셨고, 저는 당돌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구속하는 십자가이니 나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은 충분하다.”는 고백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예수교 장로교회, 기독교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소속 등 각 교파의 목사님들이 십 수명이 둘러앉아서 저를 한 가운데 앉혀 놓고 일종의 종교재판 하는 식으로 심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목사님들 중 아무도 영원한 속죄를 지지하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당시 한국 기성교회에 거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교파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담임 목사님은 저에게 고마우신 분이셨지만, 예수님 십자가의 완전구속을 타협할 수는 없었습니다. 1966년 8월 영천 기도원에서 돌아온 후 약 2개월 기간동안 가족들을 통하여서 저를 회유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거절하였으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내산 장로교회에서 떠나야 될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산 장로교회는 복음을 지지하는 분들과 적극 반대하는 분들로 양분되고 말았습니다. 1966년 10월초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으나 여름이 거의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때쯤 어느 수요저녁 집회 때였습니다. 저는 내산 장로 교회를 떠날 수박에 없어서 그 날로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확실한 기억은 안 되나 역시 “구원은 은혜로” 라는 내용 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청소년의 소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교가 마칠 무렵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하더니 급기야 고함소리로 변했습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박00 집사 님과, 김00, 또 다른 김00 청년과, 그 모친 임00집사님 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고 거친 말은 너무나 과격했습니다(권 전도사가 강단에 다시 올라가면 칼로 찔러 죽이겠다는 등의 말임). 당시 그 분들의 주장은, “예수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고 권 전도사가 말을 하니,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천당 간다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데, 이것은 이단이 하는 말이다”하며 권 전도사가 이단이라며, 내어 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런 이단을 그동안 월급 준 것이 아깝다며 사모님의 쇠농(캐비닛 농인데, 당시에는 캐비닛이 처음 나올 때라 시골에서는 보기 힘들던 때임)을 뺏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권 전도사님 편에서 천당 가는 것은 은혜라고 맞서는 사람은 몇 명의 여자들 뿐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완숙, 김희태, 이화언 등 힘없는 여자로서, 그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기란 어린 저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제가 감동받은 것은 강단에서 설교를 마친 후 여러 사람들이 욕을 하며 고함지르고 공격했지만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사택으로 가는 전도사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예수님을 보는 듯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믿어졌습니다.....” (이하 생략 )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사택으로 들어오니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내산 장로교회에서는 나가라 하며 저 야단들이지 갈 곳은 없고, 심지어 우리 부모님조차 집으로 오지 말라 하던 때입니다. 돈도 없고, 당시 저는 전도사 사례비로 1,500원 월급을 받던 때이며, 우리 자매는 보령군청 근무할 때 보건소 가족계획 요원으로 제의받던 것도 사양하고 사직했을 때였는데, 그런 중에도 두 가지 생각이 저를 머뭇거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는 ‘내가 내산을 떠날 경우, 복음을 받은 이 성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그 후에도 오래 동안 생활고 때문에 제 마음에서 고민하던 문제였습니다. 그때마다 두 가지 말씀이 생각났는데, 하나는 무정한 타조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욥 39:13 -16에서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 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 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린 성도들을 버리고 내산을 떠나면 이 무정한 타조와 같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두 번째로는 제가 그때 요한복음을 좋아했는데, 다음 말씀을 계속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 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 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 이하)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닐 거야'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져야 할 이 말씀이 계속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저는 타조가 되기도 싫었지만, 말씀을 거역하기가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캄캄했습니다.

1. 고생을 받고 어려울 때든지 근심걱정 환란을 당하여도 주가 예비하신 단 성경말씀 참 날 위로하시는 말씀일세
2. 저축 없는 새들도 다 잘사네 주만 의지하고 늘 의지하세 주가 예비하신다 하셨으니 우리 쓸것 어찌 아니 주실까
3. 풍파 중에 배가 요동함같이 사탄이 크게 시험할지라도 주가 예비하신다 하신 허락 겁을 없애 참 안심케 하시네
4. 갈 바 몰라도 아브라함같이 부르신 명을 믿어 순종하세 주가 예비하신다 하신 말씀 우리믿음을 굳건케 하시네

그런데 교회당은 여전히 소란한데 김익수라는 학생이(지금은 노량진교회 장로님) 제 방에 와서 “전도사님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래서 김익수 학생의 집 방 두 칸을 얻어 원머루 마을로 이사하니, 이곳이 충청도에서 두 번째로 성경적 교회가 시작된 사연이었습니다. 다음날 이사할 준비를 김익수, 김종규 형제님 그리고 자매님들이 해 주셨습니다. 그 날 밤 밖에서 인기척이 나서 나가보니 여집사님들 몇 분이 장독대에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분들이 왜 장독대에 계셔야 했는지 이유를 몰라서, “여기서 계속 계시려면 방안으로 들어오시라”고 강권했으나 끝내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담요를 내어 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전도회에서 담은 고추장을 가져갈까 염려해서 고추장 지키느라고 밤을 샜다는 말을 듣고 어이없어 웃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원머루 김익수 형제님 집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내산 원머루 모임이 출발하게 되는데, 이때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가지신(1965년 10월 경) 이완숙, 김희태, 이화은, 정효훈(권오홍의 아내) 자매들과 구원의 확신은 없었으나 제가 좋아서 따라나오신 분들도 많았는데, 때는 1966년 10월 초 가을로 기억합니다. 이때 함께 하신 분들이 김익수(노량진), 김종규(내산), 김효수(서울 강남), 김승수(부여), 김장수(부여), 김갑수(지금은 교파에 나가심), 서울 박형제(고인이 되심), 이완숙(대전 서부), 김희태(내산 원머루), 서거부(서 천안모임), 유영렬(고인 되심), 서거부 자모님 최씨(고인 되심), 이정훈(서거부 자매동서, 고인 되심), 이화은(고인 되심), 김승수 형제 모친 이춘희(고인 되심)자매님, 백순기(김익수형제 부인), 이세자(수원), 박우화(교파로 가심), 박연화(불신 결혼), 박우순(김종규 형제 부인), 김증수(송탄 유천희 형제 부인) 성도님들이십니다. 원머루로 나온 후 저는 저를 따라오신 분들과 어린 주일 학생들까지 일대일의 개인교제로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었으며, 이 주일학생 중에는 후에 구원받고 지금은 사역하는 박우상 형제(대전 대덕)도 있습니다. 계속 한상일(대전 서부), 한상영(전주 삼천동) 한상선(부여), 등의 형제님들이 나오셨습니다.

1967년 4월 5-10일쯤 제임스 형제님과 박준형 형제님을 모시고 집회하여, 한식(寒食) 때쯤 되는 1967년 4월 8일(토요일) 내산 원머루앞 시내 물에서 가랑비 맞으며 제임스 형제님 집례로 27명이 동시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추운 날씨임에도 물 속에 계속 계시면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침례를 주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던 제임스 형제님의 모습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날 노인까지도 침례를 받으셨는데 염려하던 것과는 달리 한사람도 감기 들지 않아서 주님의 은혜가 크시다 말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다음날 4월 9일(주일)은 야외에서 주님의 떡을 떼며 예배드린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다(이덕희 자매님). 그러므로 원머루 교회가 시작된 것은 1964년부터였으나, 예배 시작은 1967년 4월 9일(주일)이며, 침례는 1967년 4월 8일(토요일)에 처음으로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육신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그때 아내도 뼈가 나올 정도로 마르고 아이들은 기호와 기웅이 둘인데 먹는 것이 어설퍼, 특히 기호는 눈이 큰 데다 말라서 아버지인 제가 보기에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생각다 못해 동내 아이들에게 개구리를 잡아 오라 해서 아내가 징그럽다고 핀잔하는 눈을 피해서 뒤 곁에 기호와 단둘이서 냄비에 개구리를 삶으니 뽀얀 국물에 작은 기름방울이 동동 뜨고 냄새도 마치 닭 국물 같아서, 소금을 조금 넣고 간을 맞춰 맛을 보고 기호에게 주면서 “맛있지?” 물어보니 “응” 하고 대답하며 기호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후 제임스 형제님이 얼마간의 돈을 주어 큰 마음먹고 아이들 우유를 먹일 욕심으로 젖나는 염소를 7,000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이것을 보신 제임스 형제님은 “권 형제님! 권 형제님! 살! 살! 살! 살!”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꾸짖으셨습니다. 처음엔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의아했으나 ‘쌀을 사서 양식을 준비하지 왜 염소를 샀느냐'라는 말씀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 분유도 못 먹여 마음이 아파 모처럼 생긴 큰 돈으로 조금이라도 영양 보충해 주려는 마음이었는데, 제임스 형제님께서는 내가 서양식 식사를 흉내 내는 줄 아시고, 분수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신 듯 했습니다. 영어를 못하니 그냥 꾸지람을 듣기만 할 수밖에요! 가난은 계속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맥추절이라며 보리를 얼마간 가져다 주셔서 건너 방에 보리가 한 가마 반쯤 될 때나, 청년 형제님들이 모여 산에서 땔감나무를 해서 작은 부엌에 채워 월동준비를 해주면, 그것을 보고 그렇게 흐뭇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복음은 계속 퍼져나갔습니다. 부여 은산면 대양리의 이덕희 자매님께서 친정에 가서 그 부모님들과 동생들에게 전도하여 모친님과 동생 이덕례 이창수(현재 부여모임), 그리고 양주석과 이모님(고인이 되심)이 복음을 믿으셨고, 결혼한 여동생에게(부여 모임) 계속 전도하였으며, 부여시내로 이사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임옥수 자매님과 박oo자매님(진주모임)도 믿게 하셨고, 한상일 형제님은 대천시 미산면 봉성리에 가셔서 갖은 고생하시며 전도하여 임석호 형제(은평)와 그 자매, 임형제 누님 임정애(평택), 그리고 임인화(오산 유oo 형제님 부인), 임영옥 자매(한상일 형제님 부인)등 그 외에 여러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1969년 4월경부터 예배당 건축을 시작함.
1969년 12월경 강태훈, 박준형 형제님들을 모시고 전도 및 성도집회를 가짐.
1970년 예배당 임시 준공하여 사용하기 시작함.   
1972년 6월경 권오홍 형제는 전북 김제 대촌 모임으로 옮김.
1972년부터 내산은 김종규 형제를 중심으로 많은 발전을 하게 됨.
이상이 원머루 모임이 시작된 내력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해서 싣도록 하겠습니다.

권 오 홍(대전 둔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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