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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모임이 걸어온길 1 - 승송아휴(乘松雅休) [지복흥]

바위섬 0 1,230 2017.02.02 12:00

한국모임이 걸어온길 1


노량진 모임의 역사를 열린문에 게재할 목적으로 열린문 편집인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때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제 자신이 첫째로 문필의 재주가 없는 사실과 두 번째는 자기를 미화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많고, 세 번째는 독자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란 면이 있다고 보므로, 평소에 내가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린문 편집을 맡고 있는 전충환 형제님은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모임의 역사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므로, 해서 부족하지만 몇 자 적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목차순서

1. 한국 모임의 여명(黎明) 1960년대
2. 한국 모임의 약진 1970년대
3. 역경과 시련 1980년대
4. 해외선교 시대 1990년대
5. 21세기 비전
 
먼저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한국모임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으며 쓸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노량진 모임과 직·간접적인 사항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노량진 모임은 한국 모임 초기에 설립이 되었고, 저는 노량진 모임의 전신인 서울 용산구 노동회관에서 모일 때, 구원을 받았으므로 노량진 모임 시작할 때는 이미 노량진 모임으로 부르심을 받고 지금까지 주님을 섬겨오는 처지에 있습니다.
노량진 모임이 정식으로 간판을 달고 노량진동에 위치한 삼중의원 2층에 자리를 잡고 안정된 환경 가운데서 모임을 가지게 된 시기는 1964년 4월입니다. 그때 멤버로는 제임스 형님을 위시해서 박준형, 유강식, 서창식, 하진승, 최재준, 이종경, 지복흥 형제들과 김연옥, 전숙자, 김수자, 박호숙, 전영주 자매등 다수가 모임의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량진 모임을 말씀드린다면 거슬러 올라가 돈의동 모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송아휴(乘松雅休)(노리마쯔 마사야스:1863-1921)는 1963년 7월 12일 일본 에이메 현 松山市에서 무사가계(武士家系)로 출생하여 1887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관계진출로 나가던 관직을 버리고 전도인을 목적으로 메이지(明治) 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1889년 재학중 동경 니혼바시 교회에 전도인(설교담당)으로 파견되어 활약중에 영국인 선교사 H.G. 브랜드(Herdert George Brand: 1865-1942) 형제님을 만나 그가 전도하는 모임에 나가 감동을 받고,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여 5년간 일본 곳곳에 전도여행을 하다가 1896년 한국 전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내한하여 전도를 서울서 시작하여 수원으로 내려와 전도를 하여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내한하게된 동기는 1892년경 어떤 한국 청년이 일본에서 예수님을 믿고, 귀국하자 금령(禁令)을 범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동기가 되었으며 청일전쟁(1894-1895)이 끝난 뒤에 한국에서 일어난 비참한 사건을 그가 속해 있던 모임의 형제가 한국에 다녀와서, 전하는 이야기를 듣자 충격을 받고 소망이 없는 이 불쌍한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길만이 참 행복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한국에 온 시기는 정치상황이 혼미를 거듭하던 때였으며, 1994년 동학난과 청일전쟁이 끝나고 조선왕조는 붕괴의 직전에 있었으며, 열강의 각축전이 전개되는 시기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시기에 일본인의 대한 배일사상이 절정에 달한 때 무모하게(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에 왔던 것입니다.

乘松 형님은 그가 오기 10년전 1885년에 이미 한국에는 미국의 선교사 H.G. 언더우드, H.G. 아펜젤러, W.B. 스크랜톤 등이 한국인의 이러한 반일감정을 흡수하여 착실히 선교의 기반을 닦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오지 않았습니다. 1910년 일본 조합교회에서 파견된 와다세쯔네요시처럼 강력한 조직과 전도비의 후원을 가지고, 일본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무관심, 일본인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진고개에서 한국가옥에 자리잡고 처음 접촉한 사람은 일본어학교 학생이었던 조덕성(曺德成)을 만나서 한국말을 배우며 곧 노방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듬해 11월에 서울에서 처음 만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 신태일(申泰一), 윤태훈(尹泰勳) 등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898년 6월에 일본에서 브랜드 부부가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서소문에 거주하게 되자 브랜드 형제님 집에서 기거하면서 서울, 경기도, 충청도 지방으로 전도하다가 1900년 8월 9일 서울을 브랜드 선교사에게 맡기고, 복음의 불모지인 경기도 수원으로 옮겨갔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사람 속에 토착하여 한국사람을 몸으로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그를 가리켜 ‘乘松은 한국에 전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사랑하러 왔다'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가옥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 그릇을 쓰며, 심지어 태어난 아들에게도 일본말보다 한국말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자신도 한국말이 유창하여 한국 사람들이 그가 일본말을 쓰면 ‘당신은 어디서 일본말을 배웠느냐?'고 물을 정도로 스스로 한국 사람이 되어 한국 사람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부터 수원은 그의 복음전도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9년에 결혼하여 한국에서 2남 2녀를 낳았으며, 1908년에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아내는 가난 속에서 잃고, 홀몸으로 기르다가 이듬해에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가정의 불행 속에서도 계속 전도에 힘을 썼으며, 그 결과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곳곳에 착실히 결실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거듭한 그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가서 결핵병에 걸렸습니다. 더이상 전도생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요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했지만, 그는 죽기까지 6년동안 쉬지 않고 일본 곳곳으로 전도여행을 다녔고, 한국에도 세차례나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가나가와현 오다하라(小田原)에 거처를 정하여 그때 그 모임을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라는 이름으로 관청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공식으로 불려진 것이 일본, 한국에 이 모임의 명칭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21년 2월 12일에 그는 한국에 그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나이 59세요, 한국 전도를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듬해 1922년 11월 14일 그의 맏아들이 유골을 가지고 와서 한국 형제들의 슬픔 속에서 수원에 묻었습니다. 그날 수원에서는 대집회가 개최되었고, 또 그의 후계자요 한국인 전도자의 한 사람인 김태희(金太熙) 형님이 친히 한문으로 쓴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기독동신회가 걸어온 길에서 발췌).

乘松 형님의 기념비를 보기 위하여 일본 우노마사미 형제님을 비롯하여 많은 일본 형제·자매님들이 찾아와서 기념비석에 기록한 것을 탁본해 가기도 했으며, 저도 수차례 가보았지만 비석에 대해서는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최근 2·3년내에 몇차례 안내로 찾아가 乘松 형님에 대한 것을 알게 되어, 알면 알수록 큰 감명과 함께 놀라운 분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승송(乘松) 형님이 25년 동안 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을 생각해보니 E.A. 제임스 형님이야말로 제 2의 승송(乘松)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승송(乘松) 형님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在主故乘松兄妹記念碑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시작도 사람을 위해 마감도 사람을 위해, 그 생애 충애(忠愛)뿐. 몸소 주의 사명을 띠고 그 모든 소유를 버리고, 부부 한 마음으로 복음을 조선에 전하였노라. 심폐(心肺)의 모진 아픔 피골이 얼고 주려, 수족은 병으로 이즈러져, 그 조선에서의 희생 극심하도다. 그러나 그 거동이 오직 주를 의지하여 쓰고 단 즐거움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 생애는 기도와 감사만이로다. 우리의 많은 형제를 얻고, 주와 함께 모이고 주의 이름 영광 얻었나니, 그 생애 고난이요 또한 영광이로다. 임종하는 말에 조선 형제 일을 잊지않고, 그 뼈를 조선에 남기기를 원하였노라. 이에 우리의 심비(心碑)를 삼는 까닭이며, 주의 재림날에 이르리로다』

김태희 형님은 1916년 5월 승송(乘松) 형님이 방한시에 만났으며, 김태희 형제님은 이미 안성 삼죽면 동월리 자기 집에서 가정집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7년 복음신보를 발간하였으며, 승송 형님 소천식(所天式) 참석후, 다음해인 1922년 서울로 옮겨 복음신보를 서울에서 재간하며 활동을 합니다. 1917년의 한국모임의 상황은 이때까지 모임의 특별한 명칭없이 주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모임, 혹은 “그리스도인의 집회”라 하고, 예배처소 역시 주로 가정이었으며, 별도의 장소가 마련되면 이를 “성서강당” 혹은 “집회소”라 했습니다. 형식과 제도를 부정해오고 있는 형제들의 모임으로서는 당연했습니다만 종교법안 규정에 따라 일본행정당국의 요청에 의해 불가불 乘松 형님은 1917년 3월 10일자로 일본 神祭川懸에 기독동신회 설립원을 제출했으며, 그해 9월 25일에 허가되었고, 이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는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라는 명칭을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1917년 당시 교세 현황
서울 집회소 26명 / 수원북문 집회소 15명
이천 병사면 집회소 51명 / 여주군 대정리 집회소 6명
음성군 법왕면 집회소 8명 / 괘산군 사면 집회소 14명
괘산군 강천리 집회소 4명 / 괘산군 화관 집회소 11명
연백군 국남면 집회소 6명 / 개성군 노장리 집회소 14명
개성군 창천리 집회소 4명
38개 중 11개는 집회소에서 가정에서는 4명 내지 많게는 수원군 삼미면 우정면 호곡리 차병순 형님댁에서 42명 정도가 모임을 이루었다는 보고입니다.

승송(乘松) 형님이 내한하여 100년이 지난 2002년 6월 현재 한국에 30개 정도의 기독동신회 모임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호부터는 230개정도의 모임이 형성되게된 시작의 근원부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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