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실

한국 모임이 걸어온길 2 [지복흥]

송병석 0 1,301 2017.02.02 12:14
노량진 교회 시작의 배경

1958년을 전후하여 부평에 소재한 미군교회(ASCOM Chapel)에서는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 때 한국 기독교계는 복음을 듣기가 매우 희귀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미군 교회에서는 모일 때마다 병사들이 구원을 받고 기뻐하며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 간증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이 주님의 부흥의 불길이, 단지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찾아간 한국인들에게까지 번져, 마침내 1959년 3월을 전후하여 그들 가운데서 강태훈, 윤환익, 박준형 형제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강태훈 형제님은 부평에서 <선한 사마리아원>(고아원)을 설립, 경영하고 있었고, 윤환익 형제님은 미군부대에 근무하며, 박준형 형제님은 서울문리사대(현 명지대학교 전신) 영어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자 마자 강태훈 형제님이 경영하는 고아원에 모여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요일 저녁에는 복음전도 집회로, 주일은 어린이 주일학교와 어른들을 위한 복음 집회로 모였습니다(이것이 부평 모임의 전신).
 
또한 박준형 형제님은 그가 다니는 대학에서 영어성경반을 시작하여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기도회로,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는 영어성경반으로 모였습니다. 그는 졸업한 후에도 서대문에 소재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회당을 빌려 영어성경반을 계속하였는데, 거기에서부터는 다른 학교 대학생들도 참석하기 시작하여, 후에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 위치한 돈의동 성서강당(승송형제 개척)으로 옮겨서 모일 때에는 40명 내지 50 여명의 남녀 대학생들과 일반인들 까지 참석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어 갔고, 모이는 날도 편의상 토요일 오후에서 주일 오후로 변경하여 모였습니다.
 
영어성경반에 나오는 일반인들 가운데는 유강식, 서창식, 강태훈(주로 통역으로 수고), 윤명주, 고은주, 정진숙, 박은경, 미국에서 엠마오 성경학교에 다니다가 돌아온 베티 윤과 엘리스 김, 돈의동 모임의 청년들, 미군 병사들(탐 중사, 톰슨 일병, 훼리스 공군소령, 중국계 미국인 병사 제임스 양, 게브리얼 몬하임 병장), 원경선 등이 있었고, 종종 전영창 거창고등학교 교장, 맥카피 선교사를 비롯 딕 욕 선교사 등도 찾아 주었습니다.
 
이 성경공부반을 통하여 구원을 받거나 접촉이 된 자들 가운데는 서창식(수년 전 미국에서 사역 중 소천), 윤명주(미국 거주), 김연옥(박준형 처), 유강식(당시 어린이전도협회 총무, 후에 한국 네비게이토 설립, 현 서울 지역 교회 장로), 전숙자(유강식의 처), 고은주(미국 거주), 정진숙(스페인 거주?), 박은경, 하진승(현 한국 네비게이토 대표)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이 후에 1962년 10월 장충동에서 모임을 새로 시작할 때 그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다시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어떻게 영어성경반 청년들이 돈의동 모임으로 옮겨 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부평 미군 부대에 윌리암 칵스웰(William Coxwell) 이라는 육군 중사가 있었는데 그는 눈에 띌 정도로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신약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모이는 모임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그가 강태훈과 박준형 형제님을 원경선(돈의동 모임의 장로, 풀무원 설립자) 장로가 사는 소사 농장으로 안내하여 거기에서 우리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얼마 후에는 영어성경반을 서대문 하나님의 성회에서 돈의동 성서강당으로 옮겨 모이게 되고, 박준형 형제님은 거처를 부평에서 서울로 옮기면서 돈의동 모임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의동 모임을 처음 방문하여 만찬예배에 참석했을 때, 예배의 신령한 분위기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고 모임에 매료되어 모임을 그가 있어야 할 그 영혼의 안식처로, 또는 가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박준형 형제님은 1961년 5월 군에 입대하여 1962년 11월에 제대하게 되었는데, 그 어간에 거창에서 서울로 올라온 제임스 선교사님이 장충동에서 이층 셋 집을 얻어 막 결혼한 유강식 형제 내외와 함께 기거하면서 그 해 10월에 2층 집에서 몇몇 젊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박준형 형제님은 그 한 달 뒤인 11월경에 군에서 제대하면서 그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은 후에 갈월동 소재 노동회관 4층에 있는 결혼 예식장을 세로 빌려(1963년) 토요일 저녁에는 전도 집회로, 주일 오전에는 예배와 말씀 집회로 모였습니다. 이 때 지복흥, 이종경 형제 등이 구원을 받고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후에 모임은 노량진과, 상도동으로 옮겨 모이다가, 1964년 4월 노량진 삼중 의원 2층(25평 내외)을 집회소로 빌려 모이면서 노량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모임의 성도 수는 불과 25명 내외였습니다. 그 해 11월에 박준형 형제님은 주님께 전심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그가 근무하던 생명의 말씀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갈월동 노동회관

1963년 7월은 저로써는 매우 심령이 부서져서 갈급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노동회관 2층 합숙소에서 기거하였습니다. 하루는 빨리 숙소로 가보니 어떤 중년신사가 새로 들어와 신고도 없이 예수가 어떻고 하면서 종교적인 이야기만 하길래 대항해 볼려고 상대를 했으나 대항할 실력이 부족하여 그만두고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전주 모고등학교 교사로서 종교담당자였습니다.

50년대 박태선 장로의 미혹으로 학생들이 부흥 집회장소에 가서 미혹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가서 듣던 중 오히려 자신이 반하여 그의 측근이 되어 서울 장충동 전도관장, 인천전도관장 목사로 시무하다가 박장로는 엄마 장로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깨달아 그곳을 탈퇴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광고업을 하며 돌아다니다 노동회관숙소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역설하기를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하면서 무릎을 치길래 나도 동감하여 같이 무릎을 치면서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와 마음이 통하여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자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은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 종파도 많고 내가 원하지 않는 교회로 가자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생, 어느 교회로 가지요?'했더니, 그것은 자신에게 맡겨달라하길래 모든 면에서 선배이기에 그를 의지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장로교인으로서 6.25때 영락교회로 피난하여 한경직 목사님한테 총애를 받았던 때도 있고 해서 이왕이면 그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일이 돌아와 최선생에게 앞장을 서라고 했더니 2층에서 나와 어느 교회로 인도할 줄 알았는데, 다른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회관 4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도 교회가 있느냐며 따라갔더니 예식장 한쪽 구석진 곳에 수십명 정도의 젊은 형제·자매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혹 퀘이커 신자들이 아닌가 했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으로 믿고 나섰기 때문에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경험이었습니다. 너무도 조용하여 신비스런 면도 있었고, 모두다 젊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너울을 쓰고 만찬을 집행하는 성직자도 없고 해서 정말 이런 곳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예배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급한 형제가 악수를 청하면서 ‘구원받았습니까?'하며 인사했습니다. ‘신앙의 자만이 아닌가, 죽어서 천국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만남이고 해서 묵묵무답하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최선생, 좀 이상한 곳 아닙니까?'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몇 주 후면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집회가 끝나면 곧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참동안 교제를 하다가 불을 끄고 계단으로 내려가 현관입구에서 둘씩 무슨 말을 하는지, 혹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닌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도 신선해 보이고, 진지하고, 또 신실해보였습니다. 몇번 참석하면서 서로 충돌이 있기도 했는데, 그중에 심한 경우는 만찬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할 때 같이 나갔던 최영선씨가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꽤 유창한 기도를 하길래 저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님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기도를 드려야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의 기도는 주님이 열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다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한 사람이 얼마나 모욕과 실망을 할까 해서, 제가 끝난 후에 ‘너무 심한 것 아니냐, 당신들만 믿고 우리는 허수아비냐?'하면서 격분하여 항의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형제님이 방법은 좋지 못했지만 사실은 그렇다고 하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상하여 다시 나가지 말자하면서도 수요일, 주일, 토요일은 부평모임과 합동으로 열게된 복음전도집회에, 매주 토요일 극동방송 총무이며 선한사마리아원 원장인 강태훈 형제님이 젊은 형제·자매님들과 합동으로 하는 전도집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7월 말쯤 토요일에 있었던 복음집회에 나갔습니다. 그 날 강사는 제임스(E.A. JAMES)선교사였습니다. 그를 존경하였는데, 저녁식사때 아래층 식당에 들어가 25원짜리 백반을 주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주 저렴한 식사였고, 저도 그보다는 나은 매식을 하였는데 선교사가 좀 더 나은 식사를 하지 않고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선교사님은 언젠가 저의 숙소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고, 인자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 날밤 메시지는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6:2)이니, 지체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밤 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통역은 박준형 형제님이 수고를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오른손을 번쩍들어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형제님들이 ‘축하합니다!'라며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에 있던 최영선씨도 ‘나도 구원을 받았습니다.'하며 같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좋은 교제를 유지했습니다만, 그후 헤어져서 지금까지 소식을 모릅니다.

부평모임과의 관계

1963년 8월에는 노동회관에서 모이는 형제·자매들과 부평모임 식구들이 주일만찬예배만큼은 따로 모이지만 노동회관에서 수요집회를 목요일로 바꾸어서 부평모임 수요정기집회를 공동으로 갖기로 하여, 수요일에는 서울에서 부평으로 내려가 연합으로 집회를 가지므로 넘치는 형제사랑을 만끽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한 때 그렇게 했지만 교통의 불편함과 거리가 먼 관계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따로 모일 뿐이지 우리는 하나된 식구임을 알게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침례식

1963년 9월, 한강에서 침례식이 있었습니다. 부평에서 침례를 받을 형제 다섯명과 자매 세명, 서울에서는 이종경, 지복흥 두사람 모두 10명이 제임스 선교사님의 집례로 침례식을 거행했습니다. 부평에서 강태훈 형제님을 비롯하여 부평식구들과 서울식구들이 모여 한강 뱃사장에서 둘러앉아 찬송과 말씀과 기도를 드리고 한강에서 물에 잠겼다가 올라 올 때,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아난 기쁨과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결혼식

1963년 12월 24일 결혼식은 신랑 하성대(남인천모임), 신부 노흥순(남인천모임)이였으며, 하성대 형제님은 1962년 8월에 돈의동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동생인 하진승 형제님(한국네비게이토 한국 책임자)의 친형님이기도 합니다. 동생의 인도로 구원을 받아 공군중위로 재직 중에 결혼식을 서울시공관에서 거행하였는데, 주례는 신랑보다 2~3세쯤 위인 강태훈 형제님(당시 만 30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주례를 서주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주님 안에서 구원을 받은 형제님에게 부탁하여 결혼식을 거행한 것은 주안의 형제를 존중하며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박준형 형제님과 김연옥 자매님이 용산 노동회관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때 주례를 맡은 분은 최병록 노형제님이었는데 돈의동에서 젊은 형제들의 분별이 옳다고 인정하여 동역하기 위하여 나오신 분이었습니다. 70대 고령의 촌노에게 왜 부탁을 하였을까 의아해하며 물어보았더니 존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감동을 받은 결혼식이기에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모임을 상도동으로

1963년 12월 20일쯤 상도동 가정집으로 옮겨지게 된 동기는 용산노동회관측에서 비워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였고, 따라서 제임스 선교사님의 상도동 숭실대 뒷편 언덕받이에 위치한 5만원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거실과 부엌,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 마당이 있는 보통의 단독주택이었는데, 이사를 하고 며칠후 12월 24일 밤에는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귐을 나누며 좋은 교제를 나누었는데, 마침 맥카피 형제님이 장팔리에서 사후동으로 옮겨 짐을 풀고 정리도 되기전에 사후동에서 염일부 형제님, 김흥자 자매님이 올라와 제임스 선교사님댁에서 12월 24일 저녁 다함께 파티를 가지면서 주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며 밤을 새다시피 풍성한 교제를 나누었던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처음보는 사람들이지만 어색하지 않았으며, 모두 귀한 식구들로 여겨졌습니다.

그 후에 작은방에 유강식 형제님 가정이 이사를 와서 제임스 형제님과 기거를 했습니다. 어느날 저녁 기도집회를 제임스 형제님 방에서 하고 있었는데 도중 유 형제님이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습니다. 기도를 다 끝내고 보니 기도하는 시간에 도둑이 들어와 유 형제님의 귀중한 재산인 라디오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저희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는데, 제임스 형제님께서 말씀을 펴는데 마태복음 6장을 통해 주님의 나라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고 하시며, 세상의 것은 도적을 당해도 영적인 하늘의 보화는 안전하다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최병록 노형제님의 소천식

1964년 3월 최병록 노형제님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었고, 소천 소식을 듣게 되어 서울에서는 제임스 형제님을 비롯하여 형제들 모두가 초상집에 내려갔습니다. 부천시에 있는 경인고속도로변에 가까운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노형제님은 감리교에 몸담고 계시다가 동신회 형제님들과 교제를 통해서 돈의동으로 오신 분인데, 예배찬송가를 원경선, 최병록 공저하신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돈의동에서 나와서 비교적 가까운 부평모임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8km 거리인 집에서 걸어서 부평으로 다녔습니다. 노형제님의 은사는 심방하며 권면하는 은사를 가지신 분이며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특히 흩어져 있는 형제·자매님 가정을 방문하시는 은사입니다. 서창식 형제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형제님은 일제때 서울에서 평안도 중화군에 있는 한 가정을 방문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비포장도로 500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입니다. 노 형제님으로부터 직접들은 말씀인데, 한 가정을 방문하려면, 거리가 멀어서 걸어다녔는데, 대개 밤늦게 도착하면 ‘저녁진지 잡수셨어요'하면 먹지 않았어도 미안해서 먹었다고 하여, 여러번 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거짓말이 되므로 지금은 먹지 않았으면 먹지 않았다고 해서 굶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형제님이 소천하기 2-3일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부평모임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집으로 가셨는데, 이내 주님의 부르심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소천식(所天式)은 전국에서 동신회에 속한 분들, 옛날부터 잘아는 교계의 사람들, 부평과 서울, 사랑리, 대전에서 온 수백명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발인식 말씀은 제임스 형제님이 하셨고, 상여는 젊은 형제들이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는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감리교 전도사의 직분을 거절하고 보수도 없는 동신회 형제들과 교제하면서 농사에도 열심히 하지 못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못하고, 고생시켰다고 아버지를 원망해 왔는데 소천식에 훌륭한 분들이 참석하여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돌이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런 간증을 이야기하기도 해서, 축복을 많이 받는 초상집이 되었으며, 안양경찰서에서 조금지나 가서 왼쪽동산에 안장했습니다. 장지에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 7:2)라는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노량진 예배당

1964년 4월 노량진 본동 삼중의원 2층을 빌려서 교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근처에 있는 강남교회(장로교) 집사인 삼중의원 원장과 모친이신 어머니는 교회에서 찬송소리를 듣는 것이 기쁘고 축복이 된다고 하면서 호의적이었습니다. 제임스 선교사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으며, 형제·자매들도 역시 점잖고 각별히 조심하여 집주인에게 깎듯이 인사를 하며 사이 좋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나중에 도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2층에 간판을 달았는데 간판색깔은 검정바탕에 흰색으로 노량진 예배당이라고 써서 간판을 달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서구 영국식같이 보였으나 제임스 형제님이 간판을 달고 돌아와서는 흡족해하시는 것을 보며, 저희들도 기뻐하였으며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교회들이 어떤 교단이 들어왔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저녁 집회 전에는 아래층에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서 찬송을 부르며 전도를 하였고, 사람들을 2층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근처 교회 전도사들이 찾아와 무슨 교단이냐면서 질문공세도 하며, 자기 교인들을 혹시나 빼앗기지 않을까 해서 항의하고 시비도 걸고 집주인을 불러서 나가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원장인 장박사는 영어도 잘해서 제임스 형제님하고 가까운 사이가 된터라, 단호히 거절도 하였습니다. 모친은 찬송소리에 큰 위안과 축복이 된다고 하면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어 6년 동안 안정되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사후동과의 관계

맥카피 선교사님은 미국 모임에서 경북 거창 고등학교를 세워주었는데, 1960년에 건축관리자로 파송되어, 거창 장팔리에 모임을 세우고, 그곳에 젊은 학생들이 구원을 받아, 지금까지 지역에서 모임을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울에 자주 들러서 돈의동에서 교제를 하고 갈월동 노동회관에도 들려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맥카피 선교사님은 목장을 경영하면서 우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사후동에 목장을 경영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963년 장팔리에서 사후동으로 옮겨 동네 청년인 유천희 형제님이 첫열매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후동에 모임이 생겨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65년 여름부터 수양회를 주최하였는데, 전국에서 고작 100명 미만의 형제·자매들이 참석하였으며, 회비는 없었습니다. 당시는 가난해서 교통비 마련도 버거운 형편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맥카피 형제님은 지상에서 기거하고 아래층에 상에 둘러 앉았는데 식사 메뉴는 국수였습니다. 된장국에 오이를 좀 썰어넣고, 김치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런대로 먹지만 맥카피 선교사도 맨발로 검은 고무신을 신고, 함께 앉아 같은 식사를 아무 불평없이 먹었습니다. 3년 정도 수양회를 사후동에서 계속하였습니다. 사후동 아니고는 수양회를 열만한 입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의도

1950년말에 차갑술 형제님은 팀선교부에 소속하여 도서순회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59년 9월에 부평에 강태훈 형제님과 교제중에 로마서 3:23-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후 부평에 임용민 형제님, 김승복 형제님 팀선교부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았던 서창식 형제님들이 무의도를 왕래하면서 교제가 좋은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왕래가 빈번하였습니다. 다녀온 형제들의 말에 의하면 사랑이 많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는 기쁜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저는 1968년 무의도 모임의 신일순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갑술 형제님은 1974년 3월에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서울로 상경하여 지금까지 노량진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선교사들 속속 내한

1965년 컥(Kirk) 선교사(북아일랜드 뱅고시 소재 Central Hill 모임 천거)가 내한하여 즉시로 연세학당에서 한국어를 기초부터 잘배워서 정확한 발음으로 놀랍게 전도를 하며, 기쁨이 넘치는 인상으로 성도들을 위로와 격려를 하며, 특히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훌륭한 형제입니다. 그가 구원을 늦게 받았는데, 그 이유는 놀기 좋아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모임의 형제·자매들이 심방하면 뒷문으로 도망치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목수로 빈 집에서 일하는데, 주일학교에서 자주 듣던 요한복음 3장 4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고 구원을 받아, 크게 변화를 받고 3년만에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내한하게 된 것입니다. 몇 년간 노량진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외미 모임의 서명수 형제님과 동역하며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두 번 크게 헌신하였는데, 노량진 건축 때나, 혹은 큰 목돈이 생기면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모임에 헌금을 하였는데 말씀의 인용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곁 우물물을 누가 나를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우물물을 가져왔으나 다윗은 마시지 않은 것을 예로 들면서 내가 이 돈을 어찌 쓰겠는가 하면서 모임의 필요한 것에 사용하도록한 그의 믿음에 모두가 감명과 축복을 받곤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량진 모임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상도동 국민주택 23호

1965년 컥 선교사의 내한으로 제임스 형제님은 크게 격려가 되어 국민주택 23호에는 제임스 형제님, 컥 형제님, 이종경 형제님, 김수자 자매님, 정신숙 자매님, 정영주 자매등 여러 명이 함께 기거하며 살았습니다. 그 집은 항상 개방되어 누구나 가면 영접하여 대접을 받는 집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엠마오 통신강좌 사역으로 선교사 던 함 가족, 롤라 부부, 화이자 부부도 내한하였습니다. 1966년 5월 경입니다. 엠마오 통신강좌는 맥카피 선교사가 한국 책임자로 사후동에서 운영되었고 내한한 선교사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이종경 형제님을 한국책임자로 선정하여 본격적으로 문서통신강좌를 활발히 추진하였습니다.

충남 부여군 내산모임

1964년 11월 29일 권오홍 형제님이 구원을 받게 된 동기는 구원받기 전에 중학교 전신인 중학교 과정인 교육을 책임맡고 있을 때, 교사인 김설자 자매는 친구인 노량진 모임의 장연자 자매를 통하여 노량진으로 인도를 받아 구원을 받게 됨으로써, 권오홍 전도사에게 연락을 하여 서울로 초청하였습니다. 제임스 형제님 댁에서 이종경 형제님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자신도 놀라 친절과 환대에 구원을 받았다고 했으나 며칠후에 완전히 변화를 받아 돌아가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1964년에 이완숙, 백순기 두 자매님이 구원을 받고, 서울 노량진에서 제임스 선교사님과 박준형 형제님, 그리고 부평에서 강태훈 형제님이 내려가 복음을 전하므로 많은 청소년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한상일, 김효수, 김익수, 한상영, 박우상, 김종수 등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침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국 기독교 장로회 내산 교회에서는 권오홍 전도사를 파문하였는데, 그 이유는 구속은 불완전구속인데, 완전구속을 주장하며,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과, 또 믿음은 여러 가지이고, 각각인데 십자가의 완전구속을 믿어야 한다고 전파한다는 등등의 이유로 파문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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