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실

한국 모임이 걸어온길 4 - 한국 모임의 약진(1970년대)

바위섬 0 1,221 2017.02.09 21:55
한국 모임의 약진 - 1970년대
 
아현동 모임 결과

1971년은 형제자매님들이 넘쳐서 분가와 동시에 개척의 뜻으로 던함, 롤라, 화이자 가정을 비롯하여 이종경 형제님 가정, 정홍 형제님 가족 및 김우종 형제님 등 십여 명이 아현동으로 분가함으로 인해 그동안 정들었던 성도들이 가므로 인해 매우 섭섭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이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주님이 명령하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기를 바랐습니다. 떠나가신 분들도 그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섬김으로 크게 진보하였습니다. 분가로 인해 자리가 많이 비었지만 주님이 하신 일은 놀라와 곧 그 자리를 새로운 영혼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엠마오 성경 강습회

1971년도 겨울 엠마오 성경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성경강습회를 약 5일간 아현동 모임장소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그 때 성경강습회의 주제는 선교사들인 던함, 롤라 형제님 등은 사복음서 개요를 비롯하여 복음서를 위주로 담당하고 성경개요에 대해서는 부평 강태훈 형제님이 담당하였습니다. 영어통역은 이종경 형제님이 하였습니다.
그 때 참가자는 부산에서 이춘원 형제님, 부여에서 권오홍 형제님, 외미에서 서창곡 형제님, 오산의 김정곤 형제님, 노량진 지복흥 형제님 외 몇명의 형제자매들이었는데, 이렇듯 몇 사람이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큰 기억에 남고 있습니다.

추억에 남는 것은 잠자리가 없어서 여관방을 몇 개 빌리고, 식사는 아현시장에 가면 시장 안에 판자 집들이 즐비한데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려면 순대국밥 집에서 먹는 것이 간단하였습니다. 여러 끼니를 매식하던 중에 우스운 것은 어떤 형제님은 ‘순대 속은 피인데 먹을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고, 어떤 형제님은 말하기를 ‘그럼 순대는 빼고 고기만 넣어달라고 하면 되겠지만 국물에는 피가 섞여 있으니 엄격히 말하면 순대국은 합당치 않지 않느냐?'하면서 먹은 때도 있습니다. 공부도 좋았고 친근한 사귐의 교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도 합니다. 엠마오 성경학교에서 은혜로 모든 비용을 도왔습니다. 
  
한일 성도관의 영적 교류

1971년 봄 본동 242번지에 한옥을 구입하여 본체를 헐고 새로 단장하여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1971년 5월) 일본인 사역자로서는 처음 방한한 군마껭 누마다(沼田)모임에서 전심사역하는 나리다 히로미형제님이 경상도를 시작으로 6월 20일에는 노량진 수요 집회를 참석으로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성도간의 교류를 갖게 되었으며, 그 날 말씀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인데 영적으로 많은 축복을 얻었으며 참으로 좋았습니다.
다음날 김포공항에서 귀국길에 오를 때, 히로미 형제님은 한국에 가면 과거 양국관계가 나빠서 혹이나 봉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긴장하였으며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실상 가봤더니 예상외로 친절했으며, 특히 주 안의 형제자매님들은 따뜻한 사랑으로 영접해주시고 풍성한 대접을 해주셔서 감명을 받았으며, 일본 사람의 말씀을 경청해주시는 등 좋은 사귐에 놀라 귀국하자마자 동역자들에게 한국에 가자고 권하여 그해 1971년 12월말에 마에바시모임의 기다노 오사무 형제님과 다카사끼 모임의 네기시 사부로 형제님과 같은 모임의 벡컨 선교사와 함께 내한에 즈음하여 선산모임에서는 전국사역자 수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전국에서 사역자 형제님들이 모여들었으며 영적모임이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모든 침식은 은혜로 베풀어졌으며 밤에는 전도집회로 많은 영혼들이 모여 큰 축복을 받아 선산과 원동모임은 큰 격려와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972년도 12월말에는 연 2년째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전국의 모임 수는 14개 모임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일본 형제님들이 줄줄이 이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문덕무 형제님을 초청하여 일본 각지에서 연합집회를 열기도 하고 환대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공정성있게 초청계획을 세워 다음은 노량진 모임의 박준형 형제님을 초청했으며, 그 후에는 서대문 모임의 송찬호, 불광동 김종만, 부평 최수균 형제님 3인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교단 없는 종교 단체라 하여 세 사람은 많으니 한사람씩 다녀오라고 하여 우선 김종만 형제님이 다음에 송찬호, 최수균 형제님이, 다음은 권오홍, 지복흥 형제님등 3인이 초청방문하였습니다. 통역은 계속하여 문덕무 형제님이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저희 모임의 경우에도 1978년 여름에 초청장을 보내왔으나 정부에서 허락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허락을 받고나서도 일본 법무성을 거쳐야 했습니다. 법무부에서는 초청장을 보낸 교회에 연락하여 이런 사람을 초청한 사실이 있느냐, 또 왜 전도자를 초청했느냐는 등 확인을 하고난 후에 일본 법부성의 허락이 떨어지면 주일 대사관에서 비자를 허락하므로 신청하여 6개월이 걸려서 출국하는 상황이므로 큰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야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와까야마의 야마모도 스기히로 형제님은 본래 폐결핵 및 허리 디스크라는 질병 가운데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수정의 바다'라는 간증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형제님입니다. 그가 부산항에 도착한 날이 박정희 전 정권 때 유신을 선포한 날입니다. 그는 구덕모임에서 교제를 하고난 후 노량진에서 저녁집회를 하는데 구도자들이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제가 그 때 사회를 보았으며, 말씀이 끝나고 주님을 영접할 사람은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니 80명 정도가 손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많은 숫자가 앞으로 나오니 형제자매님들은 조용히 밖으로 나가시라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구원받은 영혼들은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침례 상담의 간증을 들어볼 때 그 집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므로 사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형제 자매들의 면모

1970년에는 윤병헌, 강선호, 정홍 형제님들과 자매님들이 구원을 받아 모임에 더해졌으며, 노량진은 차고 넘쳐서 용신할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 안디옥교회와 같이 다양한 은사를 갖춘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넘치는 은혜로 분가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71년 초에 아현동모임(현서대문모임)으로 또한번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윤병헌 형제님은 서울사대 졸업자로서 경신중학교(미션스쿨) 국어 교사였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을 노량진모임으로 인도하여 많은 학생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중 박록래(은평모임장노) 학생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윤 형제님은 동생인 윤주석 형제님(금천모임장노)도 인도하였고 친척인 최병조 형제님(상도모임장노)을 인도하였습니다. 1972년에 송찬호 형제님의 처제인 박천호 자매님과 결혼을 하였으며 노량진에서 주님을 신실히 섬기다가 신림동모임으로 분가할 때 그곳에서 주님을 섬겼고, 현재는 신림동예배당이라 칭하여 저희들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교회로 신림동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강선호 형제님은 명지대 재학 중에 구원을 받았으며, 가정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모친은 이해를 하여 일찍이 구원을 받았으며 큰 형수인 이인자 자매님(서울북부모임)이 구원을 받으므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 형제님은 75년 R.O.T.C 장교로 육군 8사단에 배치되어 포천사기점에 있는 병영에서 동료와 사병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큰 호응을 받은 것은 추운겨울밤에 따끈한 커피포트를 들고 추위에 떨며 보초서는 병사들에게 제공하므로 고마움으로 복음이 잘 전달되어 동료인 현상렬(포항남부모임) 중위가 구원을 받았으며 여러 병사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군인 교회에 출석하던 사기점 동네 처녀들도 구원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군부대에서 큰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노량진모임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에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침례식을 해달라는 소식을 받고 장노들인 차갑술, 최재준, 지복흥 형제들이 부대에 가서 먼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구원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에 강선호 형제님에게 침례를 베풀라고 하고, 말씀을 펴서 세례에 관한 말씀과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침례를 준 것을 상고해보았습니다. 여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을 뿐 성령이 내려오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내려가서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은 것과 같이, 강선호 형제님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으로 분별했으며, 저희 장로들은 사도행전 8장을 염두에 두고, 가서 확인을 하고 말씀을 나눈 다음에 침례식을 가졌으며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때 침례 받은 장병은, 현상렬 중위를 위시하여 여러 명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포천 사기점 마을에서는 자매님들이 먼 노량진까지 예배를 드리려고 멀다하지 않고 참석했으며 노량진에서 침례를 받은 자매님들은 최순천 자매님(평택모임 사역자부인), 박정옥 자매님(인천남동모임), 김정남 자매님(부산연제모임), 이옥희 자매님 등입니다.

정홍 형제님은 일찍부터 어머님께서 젊어서 교회생활을 하셨으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해군에서 제대하여 결혼을 하고 여러 자녀를 두고 생활하던 중 마포에서 누님인 정영희 자매님(현재 오사까 지역에서 재일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함)이 먼저 구원을 받아 동생인 정홍 형제님을 인도하였습니다. 정 형제님은 노량진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아현모임으로 분가하여 이종경 형제님과 동역하던 중에 1976년 신림동모임(현봉천동모임)이 세워지므로 봉천동으로 이사하여, 그후부터 정홍 형제님 가정은 신림동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손유호 형제님(현재 신림동모임사역자)같은 좋은 동역자가 도우므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신림동 모임에서는 신학문제로 어려움을 당했으나 잘 극복하였습니다. 정 형제님 가정은 침구가게를 경영하면서 자매님과 더불어 손수 재봉틀로 정교한 이불수를 놓아 침구를 만들어 가게를 운영하였으며, 자녀들을 양육하며 자비량하면서 생활하므로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그 후 신림동모임이 봉천동으로 옮겨지므로 현재까지 봉천동모임에서 전심사역자로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월산모임 개척과 사랑리 모임

이환기 형제님은 군 복무 중 강릉비행장의 외곽 경비를 섰는데 김재화 형제님(현 중국 목단강지역 선교사)을 만나 복음을 듣고 1969년에 구원을 받았으며 제대와 동시에 노량진모임으로 소개를 받아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봉천동 누님댁에는 동생인 이흥기씨가 노량진으로 나오게 되어 동생도 1970년도에 구원을 받고, 두 형제가 노량진 식구가 되었으며 형제님은 1971년도에 고향으로 내려가 월산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974년도에 제임스, 박준형, 지복흥 형제님들의 동역을 통하여 월산에 모임이 서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이흥기(현 안산교회 사역자) 형제님은 노량진모임에서 경기도 조암면 사랑리 모임의 일군으로 파송하게 됩니다. 사랑리모임은 일찍이 노리마쯔 형제님을 통하여 세워졌으며, 김창열 노형제님이 사역을 하시다가 주님께로 가시므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일군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노량진모임의 이계열 자매님(현서울북부모임)의 고향이기도 하고, 시댁식구들이 많은 곳인 사랑리모임에 일군이 필요하다고 권하므로, 형제님 자신이 부르심으로 알고 가기를 원해서 모임에서 주님께 의탁하여 파송하였습니다. 임지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열매를 맺었으며 시골 동네에서 기존 모임인 사랑리모임과 결별하고 뜻이 맞는 성도들과 수정모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불광동모임개척
 
불광동모임은 1973년 봄에 세워졌습니다. 1972년 8월에 노량진에서 김종만, 김종덕, 이성재, 손세일 형제님 등 여러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전에 김종만 형제님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다가 구원을 체험하였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던 중에, 1960년대 부평에서 구원을 받고 성남에서 거주하면서 노량진모임에 나오던 구자숙 자매님(LA한인모임 정낙순 형제님 부인)을 만나 노량진모임을 알게 되었으며, 불광동에 사는 가족과 동료들을 노량진으로 인도하여 신약교회의 참된 교회를 발견하여 교제 중에 예배는 노량진에서, 저녁은 불광동 김종만 형제님 댁에서 가정집회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 서창식 형제님이 자주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식구들이 늘어났습니다.

데릭 빙함이 내한하여 불광동의 대형천막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는데, 그 당시 복음의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노량진에서 성경을 통하여 교회진리와 참된 교회상에 대하여 상고하며 기다리던 중, 1973년 봄에 집을 크게 넓혀서 정식으로 지역교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모임은 불광동 수양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며,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란 간판은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눈에 잘 띄었습니다. 한 예로는 천호동 모임 시초의 형제님이었던 김순겸 형제님(미국 빌라델피아 거주)이 지나가다가 보고 자기밖에 거듭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김종만 형제님과 교제를 한 후, 성남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라는 권고를 받고 더해졌습니다.
그 후 직장 동료인 이재철 형제님(천호동모임 사역자)을 인도하여 천호동에서 김진영 형제님(왕십리모임장로)과 주님을 섬기다가 미국으로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군 전도

불광동모임의 이성재 형제님(현재 미국 캘리포니아거주)이 군에 입대하여 7사단의 어느 부대의 군종으로 근무하였습니다. 불광동에서는 김종만 형제님을 위시하여 7사단에 면회를 가서 이성재 군종의 상사인 군목을 만나 군 전도를 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호의로 군에서 전도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이에 자주 가서 전도한 결과 많은 군종들과 군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김운묵(시카고 한인모임사역자), 박건신(원당모임사역자), 송재국(도봉모임사역자), 추복현(광주서부모임사역자), 김동규(카나다거주), 김인수(묵동모임사역자), 김병관(거제모임사역자), 정달진(서서울모임장로) 형제님들이 그때 구원을 얻은 열매들입니다.
그 후 육사에도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서, 그 곳에 육사교수인 강성문(묵동모임장로) 형제님 부부와, 오수국(묵동모임장로) 부부가 구원을 받아 육사관사에도 출입하여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 묵동모임이 세워지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교사들의 구원의 역사

1970년대에는 교사 형제자매님들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여교사들이 구원을 많이 받은 것은 이정인(왕십리모임 최재준 장로부인) 자매님이 동료교사들을 노량진모임으로 소개하여 구원을 받게하였습니다. 김영숙(벤쿠버 한인모임사역자 강선호형제님부인) 자매님, 백정숙 자매님(노량진모임) 등 동료교사들을 인도하여 크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편 신림동 가정집회(박준형형제님댁)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백문화 자매님이 친구인 구경숙 자매님을 노량진으로 소개하여 1973년에 나오게 되었으며 1974년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문화 자매님은 박병은(전 부평교회), 조정래(강서모임), 김희곤, 유정숙 자매님들이, 그리고 박춘수(영동모임), 이경순(미국), 이은숙(캘리포니아) 자매님 외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학생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인도하여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양평동 가정집회

1972년부터 양평동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집회를 가졌습니다. 무의도에서 구원을 받은 남종희 자매님과 김은심 자매님이 1971년경 해태제과에 근무중 동료인 문난순, 김선자, 허숙자 자매님들을 노량진으로 인도하여 복음을 듣게 하여 구원받으므로 가정집회가 시작되었고, 그 후로도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량진모임으로 소개되어 모임에서 주일마다 예배와 교제를 나누고, 수요집회도 근무시간이 겹치지 않는한 피곤을 무릅쓰고 참석하기를 힘썼습니다.
가정집회를 위해 초기에는 서창식 형제님(미국거주 중 소천)이 말씀을 증거하였고, 서 형제님이 이민간 이후로는 지복흥 형제님이 담당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이상격 형제님(속초모임사역자)이 도와서 동역을 하였습니다. 형제들로서는 김종문형제님(동울산모임 사역자), 이숭만형제님(수부모임사역자), 장기석형제님(유평모임)들이 도왔습니다. 가정집회는 1972년부터 10년간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많을 때는 20여명이 모이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가난했지만 모일 때마다 자매님들의 수고를 통하여 풍성한 간식을 대접했습니다.

양평동 가정집회에 나오던 자매님들을 열거해보면 남종희(대전동부모임의 소천한 사역자 심병혁형제님부인), 김은심(대전내동모임), 문난순(울산동부모임 사역자 김종문형제님부인), 김선자(인천남동모임 차영복장로부인), 허숙자(인천남동모임 한창호장로부인), 민정희(부여모임), 민정숙(부여모임), 민부순(부여모임), 김숙자(속초모임 사역자 이상격형제님부인), 송양순(대전내동모임), 이근분(수부모임 백청현장로부인), 한석진(동수원모임), 박향화(광산모임 사역자나종열형제님부인), 조용미(금붕모임사역자 이창환형제님부인), 양정임(수정모임사역자 이윤식형제님부인), 박현배(동안양모임 한규채 장로형제님 부인) 자매님 외에 많은 자매님들이 참석하여 봉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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